shame


쓸모가 곧 가치의 잣대가 되는 사회를 비판한다

쓸모 여부가 곧 가치 여부의 잣대가 되는 사회를 비판해야 한다

-한 동물권 옹호 단체의 동물 안락사 논란에 대해



 지난 1월 11일 동물권단체 케어에서 자신들이 구조한 동물들을 비밀리에 안락사시킨 사실이 한 내부제보자에 의해 폭로되었다. 많은 언론에서 이를 비중 있게 보도했고, 수많은 동물보호론자, 동물애호가, 그 외 동물의 생명에 대해 온정적인 감수성을 가진 수많은 시민들이 이에 분노했다. 케어의 대표인 박소연은 지난 수 년에 걸쳐 동물소유주의 사유재산권 침해라는 법적 경계를 넘나들면서까지 열악한 환경에 처한 수많은 동물들을 적극적으로 구호했고, 그에 따라 급진적인 동물권 활동가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2016년 한 뉴스는 다수의 품종묘들을 어떠한 위생적인 관리도 없이 좁은 철장 속에 가둬놓고, 내다 팔 새끼고양이만 무한 번식하도록 운영되는 번식원 실태를 취재했는데, 해당 기사에서 박소연은 그러한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멘트를 했다. 그러한 환경에 감금된 동물의 구호한다면서 정작 구호된 동물은 안락사시킨 박소연의 행위는 모순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박소연은 이번 논란에 대해 지자체 보호소와 같은 대량 살처분이 아닌 인도적 방식의 안락사였고, (오해가 있을까하여) 알리지 못한 점은 사과한다며, 안락사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정당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해명에 동의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사태에 대한 많은 이들이 공분 그 자체에 대해 약간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 그 현상 자체에 대해서만 분노하는 것이 아닐까? 분노를 넘어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점은 없을까. 사건은 독립적으로만 발생하지 않으며, 그 기저에는 맥락이 존재하는 법이다. 나는 현상을 넘어선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침 나는 그 주 주말에 별도의 고양이 공간을 운영하는 한 책방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 곳의 주인으로부터 고양이 번식원에서 필요가 없어진 고양이는 안락사당하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책방 주인은 본인이 데리고 있는 고양이들을 가리키며, “이 녀석은 번식원에서 폴드종을 만들기 위해 데리고 있던 녀석인데, 새끼들의 귀가 계속 안 접혀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새끼들을 만드니 (원하는 품종을 생산하지 못하는 씨앗고양이인) 이 녀석도 쓸모없다는 이유로 안락사 될 처지였는데 우리 집에 데려왔습니다. 이 녀석도 번식원에 오래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건강한 새끼를 만들기 어려우니 안락사 될 운명이었는데, 여기로 데려온 것이지요.”라고 말했다. 

 동물이 가진 여러 특성들, 특정한 형질은 실상 인간이 자신들의 지식 기준에서 경험적인 데이터나 자신들이 구분 가능한 특정한 기준에 의해 분류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분류된 것 중 특정 부류는 인간이 좋아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상품으로서 높은 가치를 부여받아 가까스로 살아남는 반면, 특정 부류는 인간이 좋아하는 특성을 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상품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평가를 받고 그에 따라 죽임을 당한다. 인간이 원하는 모양새의 새끼를 낳지 못하거나 건강한 새끼를 낳지 못하면, 그 원자재는 폐기된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감정(귀여움과 사랑스러움, 그렇지 않음)을 충족할 대상을 만들기 위해 서 그 대상을 명확히 만들기 위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개체를 구분하는 선이 그어지고 그에 따라 기준에 부합하는 대상의 특성이 형성된다. 그렇게 형성된 ‘대상’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 타인이 쉽게 가지지 못한 것을 나는 가지고 싶어 하는 허영심과 지위 욕구, 욕망과 허영심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려는 물욕 등이 뒤따른다. 이 과정에서 생명 존재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고 작용과 타 존재의 고통에 공감하는 감수성이 자리할 여지는 없다. 한번 인간 욕망의 대상으로 포획된 존재나 또는 그 대상을 만들 재료로 쓰여질 수 있는 존재는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상관없이 생산, 거래, 사용되는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소유와 효용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그 대상에는 물론 인간도 포함된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나는 이번 사건에 대한 반응이 행여나 한 동물권 옹호 단체와 그 대표 활동가의 도덕성에 대한 단순한 비난, 처벌 요구에 국한되지는 않을까하고 우려한다.  우리는 그 것 이상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많은 동물애호가들이 구호활동을 옹호할 정도로 ‘잉여’동물이 많이 존재한다. 심지어 동물권을 옹호하는 활동단체마저 구호한 동물을 감당하지 못해 죽일 정도로 ‘잉여’동물이 많이 존재한다. 그 근원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할까.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사회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이 아닐까. 모든 존재가 그 자체로서 가진 가치를 부정하고, 오직 인간 욕망 실현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냉혈한 사회 말이다.    


 문득 유기동물들을 챙겨주는 사람들이나 동물권 옹호자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생각해보았다. 이들은 길고양이 먹이를 챙겨주는 이들을 캣맘충이라 일컬으며 조롱하고, 바로 그 캣맘충이 보살피고자 하는 개체가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사람은 개와 고양이는 귀엽다고 반려동물이라고 대우를 받는데, 왜 소, 돼지, 닭은 고기로 죽임을 당하는데 문제제기 하지 않느냐고 따진다(물론 이들 중 대다수는 공장식 축산업에 대한 이해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나는 이들과 생각이 다르며 이들의 주장을 옹호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이해는 간다. 일부는 정말 알 수 없는 마음의 근원에서부터 동물을 혐오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는 근원적인 증오라기보다는 아니꼬움에 가깝다. 이 아니꼬움의 감정은 상대방의 행위가 이율배반적이라고 느끼면서 생겨난다. 생명을 존중해야한다고 말하지만, 특정한  존재의 가치는 옹호하는 반면에 다른 존재의 가치는 배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 뒤따른다. 배제되는 존재는 누구인가? 그것은 나 자신이다. 우리 사회의 상당히 많은 영역에서 인간은 주인이 아니라 수단으로 격하되고 소외를 경험하기 때문에, 존중받고 싶지만 존중받지 못한 ‘나’의 마음 속엔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 분노로 찬 자아에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옹호할 아량과 여유는 자리 잡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옹호하는 존재이든, 배제하는 존재이든 간에 상관없이, 모든 존재는 그것을 판단하는 우리의 자기중심적 시각에 갇혀진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대상의 목록에서도 우리 자신은 배제되는 존재에 가깝다는 것이 문제이다. 문제의식은 점점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다시 한번 나는 이번 일이 우리의 삶,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행하는 방식 그 자체에 대해 성찰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분노와 안타까움이라는 1차적 공감이 동물권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이것이 다시 인권에 대한 인식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방식이나 가치의 우선순위, 패러다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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