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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과 고령화, 그것만이 진짜 문제일까?

지난 주에 두 가지 뉴스가 내 눈에 띄었다.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생산가능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고령인구의 빠른 증가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통계청의 ‘2017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됐다. 한국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인구구조의 변화는 단기간에 바꾸기 어려운 수준인 만큼, 사회 각 분야에서 인구 감소를 전제로 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겨레신문, 2018.8.28., ‘한국인 반감기’ 100년 뒤 2600만명뿐…빨라진 ‘인구감소 시계’)

“보건복지부는 지난 17일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 일부 개정안을 공포했다. 이에 근거한 행정처분기준을 보면 ‘비도덕적 진료행위를 한 경우’에 ‘형법 제270조를 위반해 낙태하게 한 경우’가 포함돼 있다. 이에 해당할 시 자격정지 1개월에 처해진다. 
… 최근 임신중단 합법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연달아 열리고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3만명을 넘기는 등 낙태죄 조항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민우회는 “보건복지부는 임신중지를 ‘비도덕적’이라 규정하며 오히려 여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강화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게 여성은 국민이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 
(경향신문 2018.8.23., “임신중절이 ‘비도덕 진료행위’? 박능후 복지부 장관 사퇴하라”)

 저출산과 고령화가 향후 우리사회의 존폐를 결정짓는 중대한 사회적 과제가 될 것이라는 말은 지난 십 수 년 동안 반복해서 들어왔기에 더 이상 새롭지도 않다. 다만 (도대체 어디에 쓰였는지도 모르는) 100조가 넘는 막대한 정부 재원이 지출되었는데도 그러한 경향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같은 방식으로 이 사회의 재원을 낭비하는 정치인, 관료들의 안일함, 무책임성이 더욱 놀라울 뿐이다. 올해 한국의 출산율은 세계 최초로 0.9%대에 진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내가 두 다리를 디디고 살아가는 이 사회의 극단적인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란다.    
 그러나 문득 우리 사회 걱정의 방향이 ‘저출산’이라는 표면적 사회현상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현재 진보와 보수 할 것 없이, 생산 현장에서 은퇴해 연금 등으로 생계를 연명하게 될 노인인구는 점차 늘게 되는 반면, 이들을 부양할 젊고 활력 있는 인구의 노동시장 진입은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한다. 때문에 우리의 미래가 더 큰 부담을 안게 된다는 위기론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모두들 지금 이대로라면 더 이상 현재의 사회시스템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조직 방식이 사회계약의 상(想)은 잡히지 않아 애태우고 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도 있다. 제작년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간 이세돌과의 바둑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당시, 수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은 점차 기계에 의한 인간 노동력 대체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소위 ‘노동의 종말’에 따른 실업 문제가 우리 사회를 골치 아프게 할 것이라는 걱정과 함께. 한편에서는 저출산으로 인한 생산가능 인구의 감소를 지적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기술에 의한 노동 대체로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인류의 과학기술과 그것이 동반하는 생산성이 발전이 인간 사회의 생산능력 자체를 향상시킬 것은 분명해 보인다만, 점점 늘어만 가는 노령층을 부양하고 이들을 대신해 일할 새로운 세대는 그 수가 부족하다고 한다. 다시 되묻는다. 왜 반드시 젊은이들만 노인네들을 먹여살려야 하는가?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자본은 투입 이후 얻게 되는 초과이윤으로 스스로를 증식해야만 생존이 가능한 존재다. 그리고 그 초과이윤은 노동력에서 발생한다. 맑스가 언급한 바, 투입된 비용(임금)보다 더 높은 생산량을 가져다주는 노동력이라는 생산수단이 바로 이를 가능하게 만든다. 노동력은 임금으로 지불된 자신이 가치를 온전히 상품에 이전할 뿐 아니라 잉여가치도 덤으로 얹는다. 기술이 발전해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단위 노동이 가져다주는 초과이윤의 양도 커진다. 그리고 생산 활동에 필요한 수 이상의 유휴 노동력이 꾸준히 노동시장에 존재해 산업예비군을 형성하면, 임금을 낮추는 방향으로 자본이 상당한 힘을 갖게 되는데, 기술의 발달로 다수의 노동이 단순화되거나 아예 대체되어 버리면 그러한 경향은 한층 더 강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데에 걸림돌이 있으니 바로 낮은 출산율이다. 분명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성이 증가하고, 사회 전체의 잉여노동도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은 자본의 이윤 획득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지만, 저출산에 따른 노동인구 감소는 이를 상쇄하는 힘이다. 그래서 나는 인구의 감소 전망과 관련해 언론, 학계, 정치인, 기업 등 오피니언 리더들이 진짜 걱정하는 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기반이 붕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라, 그저 현 체제, 즉 현재와 같은 생산-분배체제와 권력기반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정된 생산수단을 활용해 생산해 낸 사회 전체의 부를 100이라고 보고, 이중 전체 노동자들의 소득으로 배분된 몫을 55라고 하자(실제로 한국의 지지난해 노동소득분배율은 56.24%였다. 한국일보, 2018.8.15., “노동소득분배율 20년새 10%P 추락”). 지금까지 대다수 인구의 부양은 이 55 이내에서 해결이 되었다. 하지만 노동시장에 참여하는 인구가 점점 줄어들 계획이므로 임금의 수준이 지금처럼 그대로 결정된다면, 총생산 중 노동자에게 돌아갈 몫도 당연히 줄어들 것이다. 45가 될 수도, 35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만들려면 사회 전체의 부(富) 중 노동의 몫이 더 늘어나야한다. 현재의 55 만큼 주어지는 몫을 60, 65와 같이 재분배하는 방향으로 가야하고, 노동이 아닌 재산에서 파생되는 막대한 부를 억제해야 한다. 만약 사회 총생산에서 재산 소득의 몫이 45 또는 35로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불로소득이며, 특권적인 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소유다. 현재와 같이 생산수단을 소수의 개인이나 집단이 독점적으로 점유하고, 부의 분배도 자본의 초과이윤을 일정 수준 이상 보장해주고 난 이후에야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현재의 체제에서는 점차 가시화될 인구절벽에 따른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렵다. 다가올 문제들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면 정말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이 분명한데, 그 문제는 사회적 부의 생산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사회의 총 생산역량의 결실을 적절히 분배하는데 실패해 문제를 악화시킬 것이 자명하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그에 대비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소유, 분배 패러다임을 지금부터라도 고민하고 연구해야한다. 우선은 독점자본가의 사유재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생산수단의 소유형태를 보다 공유된 형태의 소유로 만들고 생산의 결실도 보다 균등하게 나눠 갖는 소유-생산-분배 형태를 점차 확대시키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초과이윤을 재원으로 해 기본소득 등 보편적 수당의 확대 지급도 추가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치이고, 현 체제에 대응하는 정치세력들 역시 반대, 그 다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결국 사람 먼저다. 한국사회는 이 사회 각 구성원-특히 여성의 몸을 국가가 요구하는 재생산의 틀에 맞추려 갖은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노력은 국가와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보다 개인의 행복을 더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이 확립되고, 이를 억압하는 어떠한 행위에도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의 태도로 인해 물거품이 될 것이다. 어떻게든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출산한 아이에 대한 선별적 지원을 확대하고, 이러한 의도에 반대되는 낙태죄를 계속 유지하려해도 소용없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더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만, 점점 더 불행해지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아이를 가지는 순간, 우리는 개인의 행복을 완전히 포기해야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내가 몸을 아파서까지 세상에 태어나게 만든 한 생명 역시 행복을 보장받는 주체가 아니라 사회 유지의 도구로서 대우받을 것이 뻔한데, 과연 누가 자신의 삶, 자녀의 탄생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인가. 그렇게 설계된 사회, 인간을 (생산)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세상에서 현실 인식이 바뀔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은 그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억지를 쓰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동안 어떻게 하면 이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지를 고민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지금 세상을 재설계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절실히 필요하고, 이를 위해 사회적인 소유와 생산양식, 부의 분배방식도 꾸준히 논의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최저임금 조금 오른 것을 가지고 경제가 엉망이라며 성토하는 몇몇 언론기사와 논평을 읽어보면, 우리 사회가 갈 길은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삶-정치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우리의 과제다.     


2018.9.8.

덧글

  • 2018/09/09 09:0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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