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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씨와 더불어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김지영 씨와 더불어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2016년 출간 이후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고 있고, 많은 이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책. 한편에서는 수많은 대중들의 마음속에 울림을 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이 덧씌워지고 분노어린 남성들로부터 공격당하기도 하는 책. <82년생 김지영>을 지난 주가 되어서야 한 번 읽어봤다.

 

82년생 김지영 씨는 누구인가? 김지영 씨는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해서 쓰여지게 되었는가? 이 책을 읽고 당장 내 머리 속에서 가장 많이 맴돌았던 질문이었다. 김지영 씨는 특정한 누군가를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김지영 씨와 동일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30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내가 바로 그 김지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살아오면서 보아왔던 할머니, 어머니, 누나들, 여성 친구들의 삶이 이 소설 속 김지영 씨의 할머니, 어머니, 언니 그리고 김지영 씨 본인의 삶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누군가 말한대로 김지영 씨는 우리 일상의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특별한 인물이거나 또는 그와 반대로 작가가 만들어낸 개별 현실에 속에서만큼은 실제로 살아있을 것만 같이 생생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인간을 허구적 인물이라고 지칭하는데, 김지영 씨는 그렇지 않다. 도리어 김지영 씨는 흡사 다큐멘터리나 르포에 등장하는 사회 일반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일종의 통계적 표준 모델을 스토리로 구성한 것처럼 이 소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살아나간다.

 

엉뚱하게도 내 머리 속에서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소시민 여성 한 명과 수천, 수만 군중들을 지배하는 절대자 간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어 보임에도 말이다. 리바이어던은 멀리 보아서는 왕관과 검을 쥔 단 한명의 거인으로만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보아야 비로소 그 거대한 몸체를 형성하는 수많은 사람 개개인을 볼 수 있다. 성격은 다르지만 김지영 씨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우리 시대 여성의 하나의 표상이지만 또 그녀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그 동시대를 살아온 수많은 개별적 여성들의 삶이 그녀 속에 녹아있음을 읽을 수 있다. 다만 리바이어던을 이루는 각각의 인간들은 개별적으로는 그저 개인의 생존만을 갈망하며 만인에 대해 적이 될 뿐인 늑대(사회화되지 못한 존재)에 불과할 뿐이지만, 김지영 씨를 이루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은 대체로 그녀들보다 더 강한 권력을 쥔 남성들이 만든 질서 속에 순응하거나 저항하거나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등 고도로 사회화된 존재로서 현존한다. 어떤 의미에서 김지영 씨는 리바이어던의 역방향이다. 김지영 씨는 개별 여성들의 삶과 삶이 모여 응축된 실체임에도 현실에서는 어떠한 힘도 발현할 수 없고, 어떠한 권력도 가지지 못한다.

나는 남성의 입장에서 김지영 씨의 삶을 읽으며, ‘과연 모든 여성들이 김지영 씨와 동일한 경험을 하며 살아가는가?’, ‘한국사회에서 모든 여성들이 필연적으로 김지영 씨와 동일한 경험을 할 것이라고 너무 일반화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반발감이 문득 들었다. 많은 남성들이 나와 같은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모든 여성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은 아닌데?’와 같은 반문을 던졌던 것은 그 이유 때문이리라. 그러나 작가는 작품 곳곳에 표기된 각주를 근거삼아 그저 말할 뿐이다. 우리 사회를 살아온 보통 남성들은 여성(그리고 소수자의 삶)을 날 것으로 볼 때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때로는 어머니, 누이, 여성 친구 등 자신 주변의 여성들의 삶을 흘깃 보면서 부정하기 힘든 일부 사실이 있고, 이것에 대해 약간의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도 이 세상 속에 살면서 그것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기에,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 삶이 비도덕적이었음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에, 남성들은 끝내 자기를 정당화하고자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다.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오직 일부 승자만이 양질의 사회적 자원을 독식하는 무한 경쟁의 시대,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불안정의 시대에서는 부양하고 보호할 능력을 갖춘 마초가 될 수 없는 수많은 남성들이 점차 커져가는 상실감을 마음에 품으며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남성)들이 서있는 그 열악한 사회적 위치마저도 여성과 그 외 여러 사회적 약자의 희생 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계급, 출신 지역, 가정환경, 그리고 개인의 천부적 재능 차이와 각자의 선택에 따라 우리 사회의 개별적인 여성들의 삶들은 다양하게 전개되고, 제각기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김지영 씨는 우리 사회 여성들의 삶의 일종의 교집합과도 같다. 우리 어머니들이 살아가는 동안 적나라하게 경험했던 남존여비의 가치관과 그에 따른 차별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가사일의 참여에서 시작되는) 다른 잣대로 요구되는 역할의 차이, 언제나 남성의 시선에 대응하는 성적 대상이 된다는 것,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경제적 보상, 사회적 상승의 기회의 차이, 자연스러운 것인양 떠맡게 되는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의 힘듦과 그 힘듦 상관없이 받게 되는 비하와 조롱 등은 지금 내 또래인 30대 여성들에게조차 당연하듯 받아들여져 온 일이기도 하다. 김지영 씨의 삶은 우리 사회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지언정, 적어도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가능성이 거꾸로 남성에게도 해당되는지 여부를 생각해본다면, 그 대답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장하지만, 정답이 어디에 있는지는 정말 찾기 어렵다. 내 머리 속에서도 뚜렷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를 통해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를 만드는 것 등이야말로 그 답을 찾는 과정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보다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조망하는 여러 장르의 글들, 영상작품들, 기타 문화컨텐츠들이 많이 기획되어 대중들의 마음에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를 희망한다는 바램뿐이다.

 

2018.7.2.()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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