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me


우리 이웃의 삶을 우리가 책임져야만 하는 이유

- 켄 로치의 영화 , 다니엘 블레이크와 바우만의 책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Individualized society”를 읽고 생각하다 - 

 

지난 달에 켄 로치 감독의 영화 , 다니엘 블레이크를 봤다. 5월에 있었던 칸 영화제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영화에 담아온 노장에 대한 찬사와 함께 황금종려상이 수여된 영화이기도 하고, 서구 복지제도의 위축과 그 폐해가 인간 존엄성의 파괴를 잘 그려내었다는 몇몇 평도 있었기에 기대하고 보았다. 이미 오래 전이긴 하지만 그 감독의 영화를 몇 편 보고 느꼈던 감흥이 생각나 그 때의 느낌을 떠올리며 화면 앞에 앉았는데, 영화를 보고 난 후 느낌을 말하자면 예상보다 솔직하고 담백하고 간결하게 연출해 좋았다. 특히 영화의 주인공 댄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 마지막 장면은 어떠한 극적인 효과도 없어 허무하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마치 지금 우리 시대에서 인간존엄성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허무한 일이라고 감독이 의도한 것인 양 내게 느껴졌다.

 

나는 사회권의 가치와 사회복지체제의 구축은 노동자, 시민의 연대와 투쟁, 그리고 그에서 비롯한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분명 국가나 자본의 입장에서도 노동력의 재생산 차원에서 사회복지제도의 필요성을 인지했고, 그 덕에 보다 적극적으로 복지정책이 제도화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의식, 그러한 정책이 시혜적인 차원이나 도구적인 차원이 아니라 한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할 보편적인 권리로서 받아들여진 것은 오직 노동자, 시민 등 주체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요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이제 또 다시 그 보편적인 권리가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은 시대, 개인 스스로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로 후퇴했다. 인간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또 다시 (필요성에 국한한다는) 도구적 개념 혹은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구휼 같은 것이라는) 시혜적인 개념으로 되돌아갔다. 효율성, 경제성, 비용절감이라는 이름의 망령은 이미 구축되어 있는 모든 사회적 안전 기반을 허물어트리고, 그 자리에 보통의 사람이라면 닿을 수 없을 정도의 높이로 견고한 담을 쌓는다.

 

여러 사회적 요구와 그에 부합하는 정책을 억누르는 신자유주의에서 비롯해,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권력은 감세와 더불어 사회서비스도 시장으로 외주화하고, 시장에 나온 사회서비스는 오직 게으르고 쓸모없는 인간들의요구를 어떻게 하면 차단하고 잘라내서 비용을 줄일지 궁리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원칙과 규정은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밀어내기 위해 그어진 선(line)이다.

극중 인물인 케이티가 상담시간에 불과 몇 분 늦었다는 이유로 제재대상에 올라 사회보조금 대상자로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케이티는 두 자녀를 둔 싱글맘으로 변변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 도시 이주자이다. 누구보다도 사회의 지원이 절실한 그녀에게 당국의 관료는 원칙상 안 된다고 잘라 말한다. 가부를 결정하는 차이, 그리고 그에 따라 대상자에서 배제하는 그 방식에 부여된 기준은 어떠한 윤리적인 판단보다 우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우만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사회의 사회복지업무는 점점 규정을 지킨 정도에 따라 그 적합성이 평가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고, 그 결과 일상적인 사회복지 업무는 본래의 윤리적 기반에서 점점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절대적인 확실성은 절대적인 무책임과 같다. 미리 제시된 지침을 적용하고 실현하는 데 집중하는 사람보다 더 배려심 없는 사람은 없다(지그문트 바우만, 홍지수 역,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Individualized society, p.136)

 

과거 황금기 시절 높은 수준의 사회복지를 이룩했으나 대처 시절에 많은 제도적 전통이 파괴된 영국의 경우, 그 이전과 이후 간에 느껴지는 차이의 정도는 우리사회의 그것보다 더 극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더 비참하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억압과 압제를 이겨내고 사회적 권리가 겨우 논의되고 제도화될 수 있는 환경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외환 위기의 폭풍이 사회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렇게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과 관료와 그들을 후원하는 기업들의 논리가 도처에 뿌려졌다. 우리는 언제에야 비로소 계속 유보되어온 보편적 사회권의 보장을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화시킬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시민이라기보다는 경제인으로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개인임을 넘어 연대하는 주체로서 정부 권력의 작용을 감시·제어하고, 권리를 요구하는 그런 시민이 아니다. 그보다는 개별적으로 시장에 참여해 본인이 가진 능력과 자원에 따라 그 대가를 받고, 그 차이에 따라 제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라고 강요받는 파편화되고 개별화된 개인이다. 인간이 누리는 사회적 권리는 사라지고, 시장의 수요·공급 법칙에 따른 거래의 대가만이 우리 손에 쥐어진다. 책임은 개인의 몫이다. (노동) 시장에 참여하고 그 책임을 다하는 나. 그럼에도 넉넉하지 않은 삶에 허덕이는 것은 오직 개인의 손으로 해결해야하는 몫이다.

 

역시 바우만이 말한 바, 대량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시대가 저물어가기 때문에 국가가 노동력을 재생산해야할 필요성도 예전보다는 퇴색되고, 보편적 복지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동기도 생각보다 잘 붙지 않는다. 그럼에도 실업율의 상승은 또 사회적 불안감을 완화하기 위해서라도 복지수준의 향상을 요구하지 않을까. 하지만 여전히 복지정책은 오직 소수의 낙오자, 몇몇 기준에 따라 낙오자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실행되고 있다. 그런데 불안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나는 열심히 일하지 않고서도, 능력도 없으면서도 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을 경멸한다. 나는 기꺼이 불안과 희생을 감수하는데, 왜 나는 받지 못하는 것을 그들이 받게 되는가에 대한 손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들, 빈곤층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미움이 커진다. 사회적 연대감은 생기기도 전에 이미 와해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진정한 의미의 사회서비스가 그 누구도 누리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리면, 그 제도는 불신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에 기꺼이 동의하고, 기꺼이 세금을 낼 사람들의 수가 줄어든다. 재원이 줄어들면 지출구조의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감축의 압력은 더 강해진다.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보편적인 권리는 몇몇 외부서비스 업자의 재량권에 의해 재단되어 잘려져 버린다. 이 모든 것들이 합리적 기준과 규정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도대체 어디에서 그 판단의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인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도대체 왜 우리는 충분히 가난한지, 충분히 선량한 사람인지 여부를 스스로 증명해야만 하는가. 내가 한 사회의 구성원이자 시민이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는 왜 충분하지 않은가. 그리고 어떠한 근거에서 그것을 판단할 권능이 당국(또는 외주기관)에 주어진 것인가? 그 어떤 정당성도 없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그 권능에게 구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그 구걸을 감당할 수 없는 자아를 가진 개인들, 혹은 그 구걸하는 절차 자체에도 접근할 수 없거나 그 길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개인은 인간다운 삶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으로 내 몰리게 된다. 그 자격 있음의 조건은 도대체 누가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가.

 

효율성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정도를 뜻하는 개념임을 생각해볼 때, 자격을 따지고 쳐내는 방식의 복지는 오히려 비효율적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비용절감을 목표로 복지 정책 본연의 임무 즉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라고 하는 그 효과 자체를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몇 년전 나는 한 지인과의 무상급식을 놓고 이야기 적이 있었다.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그의 논리의 요지는 부자에게도 공짜 밥을 나눠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그렇게 나누면 반드시 교실 내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하는 바, 위화감 없이 그 부자와 부자가 아닌 사람은 어떻게 나눌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그는 모양이 똑같은 카드를 만들어 찍게 하고 시스템이 자동으로 구분하게끔 고안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 되물었다. 차라리 그 시스템을 만들 비용으로 혜택을 골고루 나누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바우만은 이 문제는 결국 윤리의 문제라고 하며, 현재 윤리를 절차가 대체해버린 것으로 문제를 진단했다. 결국 절차가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배제해버리고 잘라버리는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것은 사실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를 둘러싼 권력의 작동 방식과 관련이 있다. 누구나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회적 합의와 상호 신뢰, 그리고 연대의 세계관을 해체하면, 남는 것은 결국 시장에 홀로 남겨진 개인 밖에 없다. 개인의 삶의 질은 시장참여를 통해 획득한 것만큼만 확보 가능한 것이며, 그로부터 성공할지 도태될지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라는 생각이다. 사람을 사회적 동물이 아닌 경제적 동물로 치환하려는 세계관이며, 우리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라는 신호이자, 그로부터 얻은 만큼이 바로 너희들의 분수라는 메시지이다. 따라서 복지를 둘러싼 논쟁은 사실 비용과 경제적 이해관계 문제를 넘어 어떠한 가치관이 우리 시대의 주요 사고방식을 결정하느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담론의 전쟁이기 하다.

 

그래서 우리 이웃의 삶이 더 이상 비참해져선 안 된다. 그것은 비단 그 사람의 문제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이며, 궁극적으로는 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더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이웃들의 삶도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는 인식이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야 가능하다.

복지는 정부가 국민에게 주는 시혜가 아니며, 말 그대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시민에게 반드시 주어져야만 하는 기본권으로 인정해야 함이 마땅하다. 권리는 가치와 윤리 차원의 문제이다. 사회가 우리 이웃을 책임지고 보살펴야 하는 당위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따로 필요하지 않으며 오직 인간으로서 주어져야할 기본적인 권리라고 하는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또한 기본권은 나누고, 분리하고, 배제해서 차등적으로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보편적인 권리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댄은 결국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