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me


가장 일상적인 것 아래에는 가장 정치적인 현실이 존재한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으로 돌변할 때

2017.5.2에 생각한 것을 쓴다 


노동절에 크레인에 깔려 죽은 비정규직 사람들

노동자들은 언제나와 같이, 아님 조금은 투덜거리는 태도로 일터로 나섰을 것이다. 평소보다는 좀더 피곤했을 수도 있다. 긴장감이 풀렸을 수도 있고. 여튼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 차마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불가항력 속에 자신들의 목숨이 곧 위태로워질 것을.... 노동절 저녁, 이 소식을 전한 한 신문기사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날 삼성중공업 직원들은 노동절을 맞아 쉬었고, 피해를 당한 노동자들은 모두 사내 협력업체 직원들이었다.” (2017.5.1. 한겨레신문, “노동절 조선소 하청노동자 덮친 타워크레인 30명 사상”)

 

그리고 오늘 찾아간 곳, 성주 소성리

평범한 산골 마을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농사를 짓고 있고, 특별히 관광객이 올만한 곳도 아니다. 교통의 요지가 아니다. 아마도 평소 이곳에 사는 사람들 외에는 명절날에나 찾아오는 아들·손주가족 혹은 참외 수확철에 물건을 실으러오는 짐차 외에는 오가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TV뉴스로만 들었던 사드(THAAD)라는 것이 이 고장에 들어온다고 하더니, 이웃 성주읍 사람들의 소식을 비롯해 몇몇 이들이 그것이 건강에 매우 나쁘다고 한다. 농사에도 차질이 있다고 한다. 외지의 활동가들이 이 땅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결의에 찬 얼굴로 들어온다. 그리고 이들을 막기 위한 경찰버스들이 좁은 길을 아슬아슬하게 줄지어 들어온다.

 

누군가 그랬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고. 그러나 가당키나 한 말인가. 우리에게 가장 사적인 것은 가장 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정치적인 것과는 멀어 보인다. 그저 우리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이자 먹고 삶의 현장이다. 조금만 더 고급스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에게 사적인 것은 정서적이고, 경제적인 활동들이 뒤섞이는 것이지 그리 정치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정치적인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만, 칼 슈미트의 개념대로 하면 동지와 적의 구분으로 설명될 수 있는 국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평소 우리가 느끼는 바, 삶이 고달픈 것은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현상. 자연은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과 자원을 스스로 개척해서 빌어먹고 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최소 투입 대비 최대 효용 즉 경제적인 이유가 현상을 지배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가장 원초적으로는 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성적 대상으로서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며,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무능하기 때문에 또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람과 사람 간의 때로는 사무적이지만 전반적으로는 어떻게든 정서적인 관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매우 중요한 틀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다일까?

 

하지만 일상의 삶은 그 이면의 더 큰 사회적 네트워크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그 큰 사회적 네트워크는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개인들 간의 연결만은 아닌 불평등하고, 권력에 기반한 거대한 매커니즘의 작동에 의해 형성되는 것. 그래서 일상의 노동현장이 고단한 것은 누군가 나의 고단함을 통해 이익을 취하기 때문이고, 현실의 편안함은 언제나 그 편안함의 이면에서 그것을 언제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어두움을 함께 안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것들이 가장 극단적으로 될 때, 다시 말해 표면적인 당연함이 그 아래 모순을 더 이상 감추지 못할 때, 거대한 불편함, 즉 갈등의 결정적인 순간이 등장한다.

지금껏 가장 단지 경제적이고, 정서적인 것에 불과해보이던 이 시공간이 어느새 정치적인 것으로 탈바꿈한다. 대립과 갈등이 발생하고, 그로서 너와 나의 전선이 분명해진다.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어느새 정치적인 것이 된다. 가장 사적인 것이 어느새 가장 공적인 담론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사실 정치적인 것은 없던 것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 정치는 부재한 것으로 보이나 그것은 일상이라는 표피 속에 언제나 은폐되어 있고 숨겨져 있다. 생명의 위협 또는 생사가 결정되는 문제가 발생할 때, 혹은 그 이전에 이미 사람이 위험에 처해질 때, 먹고사는 문제의 이해갈등이 매우 첨예하게 벌어지고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일이 생길 때, 우리는 우리의 삶 어딘가에 정치가 숨겨져 있었음을 그제에서야 알게 된다.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뒤늦게라도 깨달음을 느끼는 존재이기도 하다.

 

크레인사고와 관련해 삼성중공업에 유가족의 항의가 있었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중공업 사장이 피해유족을 찾아 사과도 했다고 한다. 사실 난 저 기사에서 정규직은 놀고 비정규직은 일했다고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노동절을 만끽하지는 못했다고 쓰는게 맞다고 본다. 억울함이 비로소 인간을 권리의 주체로서의 스스로를 깨닫게 한다. 사실 잃기 전에는 우리가 어떤 것을 누리고 있으며, 누려야 하는지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그것은 소성리도 마찬가지이다. 어느새 이곳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슈가 집중되는 곳이 되었다. 대통령, 국회 등도 이곳을 주시한다. 지역주민들은 이미 투사가 된지 오래다.

다시 나의 일상을 생각해본다. 단순히 정서적인 인간교류와 경제적인 계산이 지배하는 이 곳. 그런데, 그 지배하는 것의 이면에 가장 정치적인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현재의 상황을 단순하고 당연하게 만드는 그것의 이면에 다른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온 세상이 빙하로 덮인 곳도 빙하 아래 바닷물은 계속 순환하고 있다.

뒤늦은 깨달음의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정치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 혹은 가장 가까운 이들의 생명과 권리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그리고 일상이 정치적인 것으로 변모하기 직전에 우리는 가장 유리한 공간을 선점하고 그곳에 서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일상을 지킬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을 지키려면 역설적이게도 가장 일상적이지 않은(정치적인) 것을 일상 전면에 내세워야한다. 모두들 부디 그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덧글

  • 이글 2017/06/29 01:11 # 답글

    북한의 전쟁시 타격목표가 될지도 모르는 가능성 때문이면 모를까 건강에 안좋고 농사에 지장이 생긴다구요? 이미 일본의 사례와 국내에 존재하는 사드급 출력을 지닌 레이더 기지들로 증명된지 오래입니다만?
    가동된지 1년도 안되서 그련현상이 발견됬으면위에 언급된 곳들은 후쿠시마화 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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