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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씨와 더불어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김지영 씨와 더불어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2016년 출간 이후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고 있고, 많은 이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책. 한편에서는 수많은 대중들의 마음속에 울림을 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이 덧씌워지고 분노어린 남성들로부터 공격당하기도 하는 책. <82년생 김지영>을 지난 주가 되어서야 한 번 읽어봤다.

 

82년생 김지영 씨는 누구인가? 김지영 씨는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해서 쓰여지게 되었는가? 이 책을 읽고 당장 내 머리 속에서 가장 많이 맴돌았던 질문이었다. 김지영 씨는 특정한 누군가를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김지영 씨와 동일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30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내가 바로 그 김지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살아오면서 보아왔던 할머니, 어머니, 누나들, 여성 친구들의 삶이 이 소설 속 김지영 씨의 할머니, 어머니, 언니 그리고 김지영 씨 본인의 삶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누군가 말한대로 김지영 씨는 우리 일상의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특별한 인물이거나 또는 그와 반대로 작가가 만들어낸 개별 현실에 속에서만큼은 실제로 살아있을 것만 같이 생생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인간을 허구적 인물이라고 지칭하는데, 김지영 씨는 그렇지 않다. 도리어 김지영 씨는 흡사 다큐멘터리나 르포에 등장하는 사회 일반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일종의 통계적 표준 모델을 스토리로 구성한 것처럼 이 소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살아나간다.

 

엉뚱하게도 내 머리 속에서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소시민 여성 한 명과 수천, 수만 군중들을 지배하는 절대자 간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어 보임에도 말이다. 리바이어던은 멀리 보아서는 왕관과 검을 쥔 단 한명의 거인으로만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보아야 비로소 그 거대한 몸체를 형성하는 수많은 사람 개개인을 볼 수 있다. 성격은 다르지만 김지영 씨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우리 시대 여성의 하나의 표상이지만 또 그녀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그 동시대를 살아온 수많은 개별적 여성들의 삶이 그녀 속에 녹아있음을 읽을 수 있다. 다만 리바이어던을 이루는 각각의 인간들은 개별적으로는 그저 개인의 생존만을 갈망하며 만인에 대해 적이 될 뿐인 늑대(사회화되지 못한 존재)에 불과할 뿐이지만, 김지영 씨를 이루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은 대체로 그녀들보다 더 강한 권력을 쥔 남성들이 만든 질서 속에 순응하거나 저항하거나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등 고도로 사회화된 존재로서 현존한다. 어떤 의미에서 김지영 씨는 리바이어던의 역방향이다. 김지영 씨는 개별 여성들의 삶과 삶이 모여 응축된 실체임에도 현실에서는 어떠한 힘도 발현할 수 없고, 어떠한 권력도 가지지 못한다.

나는 남성의 입장에서 김지영 씨의 삶을 읽으며, ‘과연 모든 여성들이 김지영 씨와 동일한 경험을 하며 살아가는가?’, ‘한국사회에서 모든 여성들이 필연적으로 김지영 씨와 동일한 경험을 할 것이라고 너무 일반화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반발감이 문득 들었다. 많은 남성들이 나와 같은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모든 여성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은 아닌데?’와 같은 반문을 던졌던 것은 그 이유 때문이리라. 그러나 작가는 작품 곳곳에 표기된 각주를 근거삼아 그저 말할 뿐이다. 우리 사회를 살아온 보통 남성들은 여성(그리고 소수자의 삶)을 날 것으로 볼 때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때로는 어머니, 누이, 여성 친구 등 자신 주변의 여성들의 삶을 흘깃 보면서 부정하기 힘든 일부 사실이 있고, 이것에 대해 약간의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도 이 세상 속에 살면서 그것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기에,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 삶이 비도덕적이었음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에, 남성들은 끝내 자기를 정당화하고자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다.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오직 일부 승자만이 양질의 사회적 자원을 독식하는 무한 경쟁의 시대,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불안정의 시대에서는 부양하고 보호할 능력을 갖춘 마초가 될 수 없는 수많은 남성들이 점차 커져가는 상실감을 마음에 품으며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남성)들이 서있는 그 열악한 사회적 위치마저도 여성과 그 외 여러 사회적 약자의 희생 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계급, 출신 지역, 가정환경, 그리고 개인의 천부적 재능 차이와 각자의 선택에 따라 우리 사회의 개별적인 여성들의 삶들은 다양하게 전개되고, 제각기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김지영 씨는 우리 사회 여성들의 삶의 일종의 교집합과도 같다. 우리 어머니들이 살아가는 동안 적나라하게 경험했던 남존여비의 가치관과 그에 따른 차별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가사일의 참여에서 시작되는) 다른 잣대로 요구되는 역할의 차이, 언제나 남성의 시선에 대응하는 성적 대상이 된다는 것,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경제적 보상, 사회적 상승의 기회의 차이, 자연스러운 것인양 떠맡게 되는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의 힘듦과 그 힘듦 상관없이 받게 되는 비하와 조롱 등은 지금 내 또래인 30대 여성들에게조차 당연하듯 받아들여져 온 일이기도 하다. 김지영 씨의 삶은 우리 사회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지언정, 적어도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가능성이 거꾸로 남성에게도 해당되는지 여부를 생각해본다면, 그 대답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장하지만, 정답이 어디에 있는지는 정말 찾기 어렵다. 내 머리 속에서도 뚜렷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를 통해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를 만드는 것 등이야말로 그 답을 찾는 과정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보다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조망하는 여러 장르의 글들, 영상작품들, 기타 문화컨텐츠들이 많이 기획되어 대중들의 마음에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를 희망한다는 바램뿐이다.

 

2018.7.2.()에 씀. 


예멘 난민을 둘러싼 논란 – 더 좋은 사회를 위한 기회로 바라봐야

예멘 난민을 둘러싼 논란 더 좋은 사회를 위한 기회로 바라봐야

 

어느날 갑자기 그동안 한국에게는 멀고 낯설기만 했던 예멘이라는 나라에서  500명이 넘는 사람이 찾아와 난민 지위가 인정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후티 반군과 하디 정부, 그 배후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대립, 알카에다와 이를 소탕하려는 미국 등 머리가 아플 정도로 어지러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간의 갈등과 대립에 따라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그 혼돈의 땅에서 벗어나고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를 거쳐 무사증 입국이 허용된 대한민국의 섬, 제주도에까지 찾아온 것이다. 한국 정부는 갑작스런 난민 유입에 당황한 나머지 이들 500여 명에 대해 출도금지 조치를 내렸고, 난민들은 제주도에 발 묶이게 되었다.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고 하던가. 신자유주의 광풍 이후 무한 경쟁과 불안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타인을 받아들일만큼 주머니 사정도, 마음 씀씀이도 넉넉지 못하다. 타인에게 관대함을 베풀만한 베포와 자신감과마저도 남아 있지 않은 우리사회는 행여 낯선 이에게 무엇인가를 빼앗기지는 않을까, 그들이 우리를 해치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한편에서는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기 위해 들어온 가짜 난민이라는 주장에서부터 그들이 이슬람 특유의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으로 말미암아 몇몇이 테러리스트 전사가 되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이번 예멘 난민의 다수가 남성이고, 무슬림들의 남성우월주의 문화로 말미암아 이들이 우리나라 여성의 안전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걱정도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난민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으며, 무슬림 남성에 대한 공포와 편견어린 시선이 마치 객관적인 진실인양 호도되고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한 여론조사기관은 제주 난민 수용 찬반을 묻는 전국 여론조사에서 반대’49%, ‘찬성’39%로 난민 수용반대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음을 강조했다.(역설적이게도 이 전국 단위여론조사에는 정작 예맨 난민을 직접 보고 접하는 이들인 제주도민들 의견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 반대 측에서는 난민들에게도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며, 한국 정부와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난민을 수용해야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정부가 예멘 난민의 추가 유입을 막기 위해 무사증 입국이 제한 국가 목록에 예멘을 포함시켜 예멘 난민신청자의 탈출 통로를 봉쇄했으며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도 져버렸다고 비난했다. 정부가 어렵게 입국한 예멘인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하는 출도금지 조치를 내려 제주도에 고립시킨 것 역시 난민의 어려움을 배가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이 난민 협약에 조인했음에도 난민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인력과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것도, 난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공포심을 조장하는 언론의 태도 역시 인권을 옹호하는 자들에게는 주요 비판 대상이다. 극우적인 성격이 강한 한국 개신교 사회의 이슬람 혐오증과 함께 다름 인정이 되지 않는 한국사회의 배타성, 인종주의적 편견 역시 비판의 지점이 되곤 한다. 난민을 받아들여야하는 당위는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며, 한국 정부 역시 그러한 뜻에 동참하기로 국제사회에 약속했기에 이를 준수할 의무가 있다는 주장도 들려온다.

 

이 두 개의 서로 충돌하는 주장-‘국내 사회질서의 안정과 내국인 안전보장을 위해 난민 유입은 불가’ vs ‘보편적인 인권의 추구와 난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의 당위성은 각자 자신이 더 옳다고 주장하며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긋고 계속해서 대립한다. 그런데, 대중의 불안을 조장하며 권력을 유지하는 정부기관과 언론, 그리고 주요 종교는 난민 문제를 자기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고 있으며, 이들이 대중을 후자보다는 전자 쪽의 생각을 갖도록 이끌고 감에 따라 그 근거 없는 공포심은 날로 증폭되고 있다. 난민에 대해 보다 호의적이며, 개방되고 우애가 있는 사회를 만들려는 입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면 반드시 정부, 언론, 종교 권력에 대항해 대중·시민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상황을 보면 더 풍부한 이야기와 설득력 있는 주장의 근거들을 제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선 앞서 말한 (주로 육지인들의) 두 평행선이 담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단초가 될 수 있다. 몇몇 언론이 소개한 바에 따르면 상당수의 제주도민이 육지인의 우려와는 달리 예멘 난민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지낼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후원과 자원봉사를 통해 예멘 난민들에게 생필품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일부는 거처를 마련해주어 함께 지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멘인들 역시 그냥 농담 좋아하고, 상대방에게 예의바른 평범한 사람이며, “이슬람 문화 특성상 하루 다섯 번 기도하고 할랄푸드를 먹는 점을 빼면 한국 사람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느끼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한다. 일자리와 먹을거리가 없는 예멘 난민들이 일시적으로 제주도내 일손이 부족한 곳에 연결되어 일을 하는 모습이 기사화되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 산업이 발전하지 않았으며 그 경제·사회 공동체가 그리 크지 않은 제주도에 적지 않은 수의 예멘 난민들이 발 묶여있는 한, 이들을 수용해야하는 제주도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결코 예멘인의 본성은 우리와는 사뭇 달라 서로 맞지 아니하여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한 섬에 난민들을 가두어버리고, 그 섬의 주민들로 하여금 난민 수용의 책임을 전가하는, 그러면서도 난민을 아직 접하지 않은 시민들의 공포심을 방관하면서 이를 통해 현 상황을 유지하려는 국가 권력이 그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이 있다.

 

내가 의아해하는 것은 난민 수용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을 만들기 위해 또 다른 차원에서 제기할 수 있는 부분, 즉 가능한 한 난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사회에 어떠한 긍정적인 효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은 왜 그리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해서이다. 사실 당위성에 대한 주장을 강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당장 일상의 삶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우리 시민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우리 사회를 보다 개방적인 곳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의 발전과 우리의 삶의 질 향상에 어떠한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것인지 전망하고, 그 청사진을 제시해야한다. 올바른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고 언제나 할 수 있지만, 향후 전망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 그것은 비단 이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이번 일과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비록 난민 문제가 아니더라도 이미 한국 사회는 다양한 이주민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으며 세계화 시대에 그 현상은 더 가속화될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비정부 기구인 텐트 재단의 브리핑에 따르면 난민을 받아들이는데 투자한 1유로가 5년 이내에 2유로의 경제효과를 낳게 한다고말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호주 통계청 보고서를 인용해 인도적 차원에서 받아들인 난민은 일반 이민자들보다도 훨씬 강한 기업가적 성향을 보여줬다며,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익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당장에 저출산으로 미래의 노동력 부족을 걱정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새로운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막연히 가지고 있는 외부인에 대한 공포심, 일자리 상실 문제, 치안에 대한 우려는 사실 이주민의 유입 이전에 우리 사회의 개방성의 수준, 경제적 독점과 양극화, 평화와 신뢰가 담보되지 않은 사회 구성원들 간의 관계와 갈등이 만들어낸 우리 안의 괴물이지 바깥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다. 난민 수용이 곧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되려, 난민들을 받아들임을 통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영향은 비단 당장의 경제적 효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들이 잘 정착하기만 한다면 한국사회를 더욱 다양하고 역동성이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다. 다양한 인종, 문화가 융합하면서 만들어내는 창의력은 향후 우리 사회의 자산이자 경쟁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일례로 실리콘밸리의 IT 혁신과 창의성은 이주민에 대한 개방성과 포용성이 기반으로 성장했음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번 예맨 난민 유입을 계기로 난민 수용의 당위성을 넘어, 난민 수용이 우리 (시민)사회에 던져준 과제, 효과 등에 대해서까지 보다 포괄적으로 논쟁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우리 이웃의 삶을 우리가 책임져야만 하는 이유

- 켄 로치의 영화 , 다니엘 블레이크와 바우만의 책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Individualized society”를 읽고 생각하다 - 

 

지난 달에 켄 로치 감독의 영화 , 다니엘 블레이크를 봤다. 5월에 있었던 칸 영화제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영화에 담아온 노장에 대한 찬사와 함께 황금종려상이 수여된 영화이기도 하고, 서구 복지제도의 위축과 그 폐해가 인간 존엄성의 파괴를 잘 그려내었다는 몇몇 평도 있었기에 기대하고 보았다. 이미 오래 전이긴 하지만 그 감독의 영화를 몇 편 보고 느꼈던 감흥이 생각나 그 때의 느낌을 떠올리며 화면 앞에 앉았는데, 영화를 보고 난 후 느낌을 말하자면 예상보다 솔직하고 담백하고 간결하게 연출해 좋았다. 특히 영화의 주인공 댄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 마지막 장면은 어떠한 극적인 효과도 없어 허무하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마치 지금 우리 시대에서 인간존엄성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허무한 일이라고 감독이 의도한 것인 양 내게 느껴졌다.

 

나는 사회권의 가치와 사회복지체제의 구축은 노동자, 시민의 연대와 투쟁, 그리고 그에서 비롯한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분명 국가나 자본의 입장에서도 노동력의 재생산 차원에서 사회복지제도의 필요성을 인지했고, 그 덕에 보다 적극적으로 복지정책이 제도화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의식, 그러한 정책이 시혜적인 차원이나 도구적인 차원이 아니라 한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할 보편적인 권리로서 받아들여진 것은 오직 노동자, 시민 등 주체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요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이제 또 다시 그 보편적인 권리가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은 시대, 개인 스스로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로 후퇴했다. 인간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또 다시 (필요성에 국한한다는) 도구적 개념 혹은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구휼 같은 것이라는) 시혜적인 개념으로 되돌아갔다. 효율성, 경제성, 비용절감이라는 이름의 망령은 이미 구축되어 있는 모든 사회적 안전 기반을 허물어트리고, 그 자리에 보통의 사람이라면 닿을 수 없을 정도의 높이로 견고한 담을 쌓는다.

 

여러 사회적 요구와 그에 부합하는 정책을 억누르는 신자유주의에서 비롯해,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권력은 감세와 더불어 사회서비스도 시장으로 외주화하고, 시장에 나온 사회서비스는 오직 게으르고 쓸모없는 인간들의요구를 어떻게 하면 차단하고 잘라내서 비용을 줄일지 궁리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원칙과 규정은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밀어내기 위해 그어진 선(line)이다.

극중 인물인 케이티가 상담시간에 불과 몇 분 늦었다는 이유로 제재대상에 올라 사회보조금 대상자로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케이티는 두 자녀를 둔 싱글맘으로 변변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 도시 이주자이다. 누구보다도 사회의 지원이 절실한 그녀에게 당국의 관료는 원칙상 안 된다고 잘라 말한다. 가부를 결정하는 차이, 그리고 그에 따라 대상자에서 배제하는 그 방식에 부여된 기준은 어떠한 윤리적인 판단보다 우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우만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사회의 사회복지업무는 점점 규정을 지킨 정도에 따라 그 적합성이 평가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고, 그 결과 일상적인 사회복지 업무는 본래의 윤리적 기반에서 점점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절대적인 확실성은 절대적인 무책임과 같다. 미리 제시된 지침을 적용하고 실현하는 데 집중하는 사람보다 더 배려심 없는 사람은 없다(지그문트 바우만, 홍지수 역,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Individualized society, p.136)

 

과거 황금기 시절 높은 수준의 사회복지를 이룩했으나 대처 시절에 많은 제도적 전통이 파괴된 영국의 경우, 그 이전과 이후 간에 느껴지는 차이의 정도는 우리사회의 그것보다 더 극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더 비참하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억압과 압제를 이겨내고 사회적 권리가 겨우 논의되고 제도화될 수 있는 환경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외환 위기의 폭풍이 사회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렇게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과 관료와 그들을 후원하는 기업들의 논리가 도처에 뿌려졌다. 우리는 언제에야 비로소 계속 유보되어온 보편적 사회권의 보장을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화시킬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시민이라기보다는 경제인으로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개인임을 넘어 연대하는 주체로서 정부 권력의 작용을 감시·제어하고, 권리를 요구하는 그런 시민이 아니다. 그보다는 개별적으로 시장에 참여해 본인이 가진 능력과 자원에 따라 그 대가를 받고, 그 차이에 따라 제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라고 강요받는 파편화되고 개별화된 개인이다. 인간이 누리는 사회적 권리는 사라지고, 시장의 수요·공급 법칙에 따른 거래의 대가만이 우리 손에 쥐어진다. 책임은 개인의 몫이다. (노동) 시장에 참여하고 그 책임을 다하는 나. 그럼에도 넉넉하지 않은 삶에 허덕이는 것은 오직 개인의 손으로 해결해야하는 몫이다.

 

역시 바우만이 말한 바, 대량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시대가 저물어가기 때문에 국가가 노동력을 재생산해야할 필요성도 예전보다는 퇴색되고, 보편적 복지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동기도 생각보다 잘 붙지 않는다. 그럼에도 실업율의 상승은 또 사회적 불안감을 완화하기 위해서라도 복지수준의 향상을 요구하지 않을까. 하지만 여전히 복지정책은 오직 소수의 낙오자, 몇몇 기준에 따라 낙오자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실행되고 있다. 그런데 불안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나는 열심히 일하지 않고서도, 능력도 없으면서도 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을 경멸한다. 나는 기꺼이 불안과 희생을 감수하는데, 왜 나는 받지 못하는 것을 그들이 받게 되는가에 대한 손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들, 빈곤층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미움이 커진다. 사회적 연대감은 생기기도 전에 이미 와해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진정한 의미의 사회서비스가 그 누구도 누리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리면, 그 제도는 불신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에 기꺼이 동의하고, 기꺼이 세금을 낼 사람들의 수가 줄어든다. 재원이 줄어들면 지출구조의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감축의 압력은 더 강해진다.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보편적인 권리는 몇몇 외부서비스 업자의 재량권에 의해 재단되어 잘려져 버린다. 이 모든 것들이 합리적 기준과 규정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도대체 어디에서 그 판단의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인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도대체 왜 우리는 충분히 가난한지, 충분히 선량한 사람인지 여부를 스스로 증명해야만 하는가. 내가 한 사회의 구성원이자 시민이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는 왜 충분하지 않은가. 그리고 어떠한 근거에서 그것을 판단할 권능이 당국(또는 외주기관)에 주어진 것인가? 그 어떤 정당성도 없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그 권능에게 구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그 구걸을 감당할 수 없는 자아를 가진 개인들, 혹은 그 구걸하는 절차 자체에도 접근할 수 없거나 그 길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개인은 인간다운 삶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으로 내 몰리게 된다. 그 자격 있음의 조건은 도대체 누가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가.

 

효율성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정도를 뜻하는 개념임을 생각해볼 때, 자격을 따지고 쳐내는 방식의 복지는 오히려 비효율적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비용절감을 목표로 복지 정책 본연의 임무 즉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라고 하는 그 효과 자체를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몇 년전 나는 한 지인과의 무상급식을 놓고 이야기 적이 있었다.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그의 논리의 요지는 부자에게도 공짜 밥을 나눠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그렇게 나누면 반드시 교실 내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하는 바, 위화감 없이 그 부자와 부자가 아닌 사람은 어떻게 나눌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그는 모양이 똑같은 카드를 만들어 찍게 하고 시스템이 자동으로 구분하게끔 고안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 되물었다. 차라리 그 시스템을 만들 비용으로 혜택을 골고루 나누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바우만은 이 문제는 결국 윤리의 문제라고 하며, 현재 윤리를 절차가 대체해버린 것으로 문제를 진단했다. 결국 절차가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배제해버리고 잘라버리는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것은 사실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를 둘러싼 권력의 작동 방식과 관련이 있다. 누구나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회적 합의와 상호 신뢰, 그리고 연대의 세계관을 해체하면, 남는 것은 결국 시장에 홀로 남겨진 개인 밖에 없다. 개인의 삶의 질은 시장참여를 통해 획득한 것만큼만 확보 가능한 것이며, 그로부터 성공할지 도태될지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라는 생각이다. 사람을 사회적 동물이 아닌 경제적 동물로 치환하려는 세계관이며, 우리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라는 신호이자, 그로부터 얻은 만큼이 바로 너희들의 분수라는 메시지이다. 따라서 복지를 둘러싼 논쟁은 사실 비용과 경제적 이해관계 문제를 넘어 어떠한 가치관이 우리 시대의 주요 사고방식을 결정하느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담론의 전쟁이기 하다.

 

그래서 우리 이웃의 삶이 더 이상 비참해져선 안 된다. 그것은 비단 그 사람의 문제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이며, 궁극적으로는 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더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이웃들의 삶도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는 인식이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야 가능하다.

복지는 정부가 국민에게 주는 시혜가 아니며, 말 그대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시민에게 반드시 주어져야만 하는 기본권으로 인정해야 함이 마땅하다. 권리는 가치와 윤리 차원의 문제이다. 사회가 우리 이웃을 책임지고 보살펴야 하는 당위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따로 필요하지 않으며 오직 인간으로서 주어져야할 기본적인 권리라고 하는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또한 기본권은 나누고, 분리하고, 배제해서 차등적으로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보편적인 권리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댄은 결국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가장 일상적인 것 아래에는 가장 정치적인 현실이 존재한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으로 돌변할 때

2017.5.2에 생각한 것을 쓴다 


노동절에 크레인에 깔려 죽은 비정규직 사람들

노동자들은 언제나와 같이, 아님 조금은 투덜거리는 태도로 일터로 나섰을 것이다. 평소보다는 좀더 피곤했을 수도 있다. 긴장감이 풀렸을 수도 있고. 여튼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 차마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불가항력 속에 자신들의 목숨이 곧 위태로워질 것을.... 노동절 저녁, 이 소식을 전한 한 신문기사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날 삼성중공업 직원들은 노동절을 맞아 쉬었고, 피해를 당한 노동자들은 모두 사내 협력업체 직원들이었다.” (2017.5.1. 한겨레신문, “노동절 조선소 하청노동자 덮친 타워크레인 30명 사상”)

 

그리고 오늘 찾아간 곳, 성주 소성리

평범한 산골 마을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농사를 짓고 있고, 특별히 관광객이 올만한 곳도 아니다. 교통의 요지가 아니다. 아마도 평소 이곳에 사는 사람들 외에는 명절날에나 찾아오는 아들·손주가족 혹은 참외 수확철에 물건을 실으러오는 짐차 외에는 오가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TV뉴스로만 들었던 사드(THAAD)라는 것이 이 고장에 들어온다고 하더니, 이웃 성주읍 사람들의 소식을 비롯해 몇몇 이들이 그것이 건강에 매우 나쁘다고 한다. 농사에도 차질이 있다고 한다. 외지의 활동가들이 이 땅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결의에 찬 얼굴로 들어온다. 그리고 이들을 막기 위한 경찰버스들이 좁은 길을 아슬아슬하게 줄지어 들어온다.

 

누군가 그랬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고. 그러나 가당키나 한 말인가. 우리에게 가장 사적인 것은 가장 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정치적인 것과는 멀어 보인다. 그저 우리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이자 먹고 삶의 현장이다. 조금만 더 고급스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에게 사적인 것은 정서적이고, 경제적인 활동들이 뒤섞이는 것이지 그리 정치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정치적인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만, 칼 슈미트의 개념대로 하면 동지와 적의 구분으로 설명될 수 있는 국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평소 우리가 느끼는 바, 삶이 고달픈 것은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현상. 자연은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과 자원을 스스로 개척해서 빌어먹고 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최소 투입 대비 최대 효용 즉 경제적인 이유가 현상을 지배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가장 원초적으로는 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성적 대상으로서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며,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무능하기 때문에 또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람과 사람 간의 때로는 사무적이지만 전반적으로는 어떻게든 정서적인 관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매우 중요한 틀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다일까?

 

하지만 일상의 삶은 그 이면의 더 큰 사회적 네트워크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그 큰 사회적 네트워크는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개인들 간의 연결만은 아닌 불평등하고, 권력에 기반한 거대한 매커니즘의 작동에 의해 형성되는 것. 그래서 일상의 노동현장이 고단한 것은 누군가 나의 고단함을 통해 이익을 취하기 때문이고, 현실의 편안함은 언제나 그 편안함의 이면에서 그것을 언제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어두움을 함께 안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것들이 가장 극단적으로 될 때, 다시 말해 표면적인 당연함이 그 아래 모순을 더 이상 감추지 못할 때, 거대한 불편함, 즉 갈등의 결정적인 순간이 등장한다.

지금껏 가장 단지 경제적이고, 정서적인 것에 불과해보이던 이 시공간이 어느새 정치적인 것으로 탈바꿈한다. 대립과 갈등이 발생하고, 그로서 너와 나의 전선이 분명해진다.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어느새 정치적인 것이 된다. 가장 사적인 것이 어느새 가장 공적인 담론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사실 정치적인 것은 없던 것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 정치는 부재한 것으로 보이나 그것은 일상이라는 표피 속에 언제나 은폐되어 있고 숨겨져 있다. 생명의 위협 또는 생사가 결정되는 문제가 발생할 때, 혹은 그 이전에 이미 사람이 위험에 처해질 때, 먹고사는 문제의 이해갈등이 매우 첨예하게 벌어지고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일이 생길 때, 우리는 우리의 삶 어딘가에 정치가 숨겨져 있었음을 그제에서야 알게 된다.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뒤늦게라도 깨달음을 느끼는 존재이기도 하다.

 

크레인사고와 관련해 삼성중공업에 유가족의 항의가 있었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중공업 사장이 피해유족을 찾아 사과도 했다고 한다. 사실 난 저 기사에서 정규직은 놀고 비정규직은 일했다고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노동절을 만끽하지는 못했다고 쓰는게 맞다고 본다. 억울함이 비로소 인간을 권리의 주체로서의 스스로를 깨닫게 한다. 사실 잃기 전에는 우리가 어떤 것을 누리고 있으며, 누려야 하는지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그것은 소성리도 마찬가지이다. 어느새 이곳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슈가 집중되는 곳이 되었다. 대통령, 국회 등도 이곳을 주시한다. 지역주민들은 이미 투사가 된지 오래다.

다시 나의 일상을 생각해본다. 단순히 정서적인 인간교류와 경제적인 계산이 지배하는 이 곳. 그런데, 그 지배하는 것의 이면에 가장 정치적인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현재의 상황을 단순하고 당연하게 만드는 그것의 이면에 다른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온 세상이 빙하로 덮인 곳도 빙하 아래 바닷물은 계속 순환하고 있다.

뒤늦은 깨달음의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정치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 혹은 가장 가까운 이들의 생명과 권리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그리고 일상이 정치적인 것으로 변모하기 직전에 우리는 가장 유리한 공간을 선점하고 그곳에 서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일상을 지킬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을 지키려면 역설적이게도 가장 일상적이지 않은(정치적인) 것을 일상 전면에 내세워야한다. 모두들 부디 그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2016년 12월. 한국의 징병제에 대한 거칠고 개인적인 생각을 해 본다

2016년 12월


 나와 같은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해 오고 있는 정훈 씨가 얼마 전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활동가로 일하기 전 인디뮤지션이었던 그가 함께 한지 얼마 되지 않아군 미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가 병역거부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동안 나는 최대한 그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싶지 않아 병역거부든 군대든 관련된 이야기를 거의 잘 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정훈 씨 본인 역시 군대를 갈 것이라고 에둘러 말했기에 별 생각 없이 지내다 보니 얼마 전 병역거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생각보다 놀랐던 것이 사실이다. 군에 구속되나 감옥에 구속되나 국가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기에 그에게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라고 권했지만, 그의 생각은 확고한 것 같다.


정훈 씨와 몇 차례 어울려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한국의 징병제, 그 국가동원의 체계에 대해 잊고 살았던 감수성이나 생각이 다시금 살아 오른다. 정훈 씨가 병역거부를 하려는 사유에는 국가가 개인의 일신을 구속·통제하고, 기본권을 억압하는 그 제도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이 담겨있고, 대체복무제 도입 역시 언급하고 있는데, 나 또한 군에 갈 나이가 되었을 당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농담조로 조국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는데?”라고 주변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는데,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국가라는 조직이 개인의 삶을 앗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몹시 부당하다고 여겨졌다. 군대는 다양한 인간을 같은 틀에 넣어 찍어내는 공장과 같이 여겨졌고, 그건 여전히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당시 나는 군대나 감옥이나 국가가 나 개인의 일신을 구속하게 되는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했고, 이 사실로 낙인을 찍히고 싶지 않았으며, 부모님을 설득할 용기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게는 그 것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결정을 내린 정훈 씨에게 어떻게든 응원의 메시지를 외치고 싶은 마음이다.

 

한편, 어제는 역시 함께 일하고 있는 선배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의도치 않은 토론을 하게 되었다. 나는 현재의 징병제는 문제가 있지만 모병제 또한 대안이 될 수는 없으며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에게 선택의 여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모병제는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는 사람들만 가게 되어 결국 가장 사회적 약자들이 총을 들고 생명을 희생하러 가게 되는 제도이다. 사회불평등이 평화와 폭력의 문제에도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선배간사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일정정도 희생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가가 유지되는데 필수적인 요소인 영토와 주권과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 일정정도의 제약을 통해 국가의 안전보장을 보장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국가라는 체계를 넘어 생각을 할 필요가 있으며, 안전보장 역시 현재 총을 들고 싸움을 준비하는 개념으로만 국한되어 있는데, 그러다 보니 사회 다양한 곳에서 진짜 삶을 지키기 위한 안전보장은 이루어지지 않고 경시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월호가 아닐까?

여튼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든 생각들을, 별다른 공부는 하지 않았지만 마냥 나의 상상력으로 거칠게 메모해봤다.

 

1. 한국의 징병제도의 문제.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징병제는 개인의 일신에 대한 국가의 전면적인 구속을 요구하고 있으며, 정훈교육, 내부의 분위기들을 보면 거의 전인적으로도 구속하고 있다. 사실 국방의 의무는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일반 시민들의 인식이다. 군대를 회피할 능력이 있는 권력자, 엘리트는 의무를 다하지 않고, 힘없는 보통사람들만 군에 끌려가게 된다. 또한 여성을 비롯해 사회적 약자들을 의무로부터 배제시키고 있는데, 달리 말하면 이들을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이로서 1등 국민과 2등 국민을 나누는 선이 그어지게 되며, 불평등한 조건, 부조리한 상황에서 부당하게 의무를 수행하게 된 일부 남성들은 자신들의 그에 따른 분노를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더 약자이고 만만한 2등 국민에게 폭발하게 된다. 본질은 그렇게 흩뜨려진다.

한편, 이러한 조건 속에서 군 입대가 정해진다는 것은 그 동원의 대상이 대는 사람들에 어떠한 사명감도 주지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진다. 제대로 된 사회적 합의에 의해 국가공동체를 지키자는 대의를 사회 구성원들은 진심으로 동의하지 않는데, 이미 불평등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합의되지 의무, 즉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적인 의무는 아닌 족쇄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군은 사병들에게 어떠한 사명감과 자부심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박탈감과 불만만을 증폭시킬 뿐이다. 또한 현재의 징병제도는 대체 그 실체도 불분명한 국가라는 시스템을 위해 개인에게 충성을 강요하는데, 그렇게 해야만 하는 목적의식은 불분명해 보인다. 지난 역사의 흔적을 보아도 우리 사회는 피 흘려 일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 과실은 결국 권력과 부는 이에 참여하지 않은 소수 권력자에게만 주어졌다. 우리는 왜 우리는 충성해야하고 무엇 위해 충성해야하는지를 제대로 설명받지 못했다.

한마디로 현재의 시스템은 존재의 이유는 불분명한데,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면서도, 소수 권력자에게는 굉장히 유리하게 작용하는 측면이 크다는 말이다. 방산비리와 같은 군내에서 발생하는 비리와 사익추구, 이권 카르텔은 그 본질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그 반작용으로 군 조직이 진정 우리 공동체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시스템인가에 대해 것인가에 대해 나는 굉장히 회의적으로 본다. 또한 군내 인권문제와 의문사 등은 이 체계가 사람을, 시민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게 만든다.

 

2. 내가 정한 몇 가지 거친 원칙들.

위와 같은 이유로 지금의 군 제도는 지속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에 큰 변화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필요할 몇 가지 원칙들을 거칠게나마 정리해봤다.

 

우선 개인의 선택과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시민은 동원의 대상자가 아니라 권리의 주체이다. 의무 또한 시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합의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배제가 없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개인의 선택에 따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사정에 따라 각자의 방식대로 사회의 안전보장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구성원들 모두가 제각기 사회의 안전보장에 기여할 때, 동등한 위치에서 권리의 주체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상호간의 불신도 완화될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안보라는 개념을 현재의 국방이라는 협소한 의미에서 벗어나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모든 행위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모든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고, 모든 이들이 기여할 수 있는 안보가 되며, 공동체의 운명을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안보에 기여하는 사람들은 그 일을 통해 자긍심과 효용성을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지키는 대상이 나에게 보이고, 내게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특정한 부역을 강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신의 구속은 최소화해야한다. 이미 말했듯이 시민 개개인은 권리의 주체이며 당연히 자신의 신체에 대한 자유, 주거, 사회적 권리를 가지는데, 그러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의무를 강제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시민 개개인으로 하여금 우리나라라는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가상의 대상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고 시키는 것은 인간을 수단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시민 개개인에게 그 일의 복무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이웃을 위해 유익한 일임을 확신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합의되고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어 개인이 납득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3. 모병제에 대해

나는 위의 원칙에 모병제는 철저히 반대된다고 생각한다. 모병제는 희생의 불평등을 전제로 한다. 과거 종교개혁이 있기 전 중세교회가 면죄부를 돈을 주고 팔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마도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군대에 갈 확률이 높다. 돈과 권력이 있는 이들은 오히려 모병제에 따라 공동체의 안전보장에 관련된 복무에서 면제될 길이 열린다. 마이클 무어의 옛 영화 볼링포콜럼바인에서는 그 적폐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었는데, 미국에서 가난한 이들, 특히 거리의 부랑자들이 돈 벌래?”라는 제안에 군에 입대했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어갔다. 그 동안 미 방산업체, 석유업체, 그리고 이들에게 투자한 월가는 엄청난 돈 방석에 앉았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과도한 것일까? 그리고 모병제 역시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고 이들을 2등주민화하기는 마찬가지이다.

 

4. 간략한 제안(안보개념의 확대,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방식의 징병제도, 군에 대한 사회의 통제강화)

우선 개인의 선택의 가능성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현재의 안보개념을 더 확대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 공동체의 삶을 안전하게 지키는 모든 일을 안보의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확대한다면,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는 길이 다양화되므로 그에 따라 개인의 자율성의 여지는 확대된다. 그렇게 된다면 집총을 거부하는 평화주의자들도 거침없이 대체복무를 선택해 다른 방식으로 사회의 안전보장에 기여할 수 있다. 여기에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서비스 직무, 타인이 위험에 빠졌을 때 신속하게 구호하는 일, 다른 시민의 위임을 받아 일상에서 간과되기 쉽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위험의 요소들을 점검하는 것과 관련된 일, 질서유지 등 등 다양한 일들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이고 일정 정도 폭력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안보도 당연히 중요하다. 나는 현 징병제도를 유지하되, 예비군처럼, 혹은 상근직 군인처럼 운영하고 복무자는 자신의 삶이 이루어지는 그 공간, 그 지역 내에서 복무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본다. 직접 자신의 고향을, 자신의 가족과 이웃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국가라는 불특정 대상이 아니라 보다 명확하고 개인에게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가치를 위해 지키게 하는 것이다. 중앙의 정예병, 특정한 임무를 띈 부대는 직업군인이 전담한다. 이는 국가라는 보다 큰 공동체를 염두해 두고 있고, 그에 대한 충성심을 나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역할을 선택해 수행할 가능성이 높은 집단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의 운영은 시민의 손에 닿을 수 있어야 하고 잘못된 일이 발생할 경우 언제든지 개입해 개선될 수 있어야 한다. 사회구성원들이 합의한 원칙이 잘 반영하도록 감시와 견제가 가능해야한다. , 안전보장과 군 제도는 문민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 그동안 군이 특정한 정치집단(주로 권력을 쥔 기득권 세력)을 위해 복무해왔으며, 그 가운데에서 군 수뇌부들이 그 콩고물을 먹어왔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모두를 위한 군, 신뢰받고 존경받는 군이 되려면 적어도 군사기밀을 이유로 소수의 권력자와만 소통하고 대다수 국민에게는 명령하는 관계에서 탈피해야한다. 군의 인사, 돈의 사용은 투명해야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내부운영에서 기본권을 침해하는 요소가 없는지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당연히 군 외부에서 정기적으로 감사하고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행정의 총괄 운영도 시민의 대표가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저런 메모를 미리 해두었는데, 생각보다 다채롭고 풍부하지는 않다. 내가 이 분야와 관련해 특별히 공부를 하거나 자료를 찾아보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추상적이고, 거칠게 쓰여지기만 한다. 그래도 한 번씩은 막연한 상상력을 펼칠 기회는 있어야 하며, 그 또한 보통의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권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운명을 소수의 전문가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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