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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과 고령화, 그것만이 진짜 문제일까?

지난 주에 두 가지 뉴스가 내 눈에 띄었다.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생산가능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고령인구의 빠른 증가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통계청의 ‘2017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됐다. 한국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인구구조의 변화는 단기간에 바꾸기 어려운 수준인 만큼, 사회 각 분야에서 인구 감소를 전제로 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겨레신문, 2018.8.28., ‘한국인 반감기’ 100년 뒤 2600만명뿐…빨라진 ‘인구감소 시계’)

“보건복지부는 지난 17일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 일부 개정안을 공포했다. 이에 근거한 행정처분기준을 보면 ‘비도덕적 진료행위를 한 경우’에 ‘형법 제270조를 위반해 낙태하게 한 경우’가 포함돼 있다. 이에 해당할 시 자격정지 1개월에 처해진다. 
… 최근 임신중단 합법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연달아 열리고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3만명을 넘기는 등 낙태죄 조항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민우회는 “보건복지부는 임신중지를 ‘비도덕적’이라 규정하며 오히려 여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강화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게 여성은 국민이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 
(경향신문 2018.8.23., “임신중절이 ‘비도덕 진료행위’? 박능후 복지부 장관 사퇴하라”)

 저출산과 고령화가 향후 우리사회의 존폐를 결정짓는 중대한 사회적 과제가 될 것이라는 말은 지난 십 수 년 동안 반복해서 들어왔기에 더 이상 새롭지도 않다. 다만 (도대체 어디에 쓰였는지도 모르는) 100조가 넘는 막대한 정부 재원이 지출되었는데도 그러한 경향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같은 방식으로 이 사회의 재원을 낭비하는 정치인, 관료들의 안일함, 무책임성이 더욱 놀라울 뿐이다. 올해 한국의 출산율은 세계 최초로 0.9%대에 진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내가 두 다리를 디디고 살아가는 이 사회의 극단적인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란다.    
 그러나 문득 우리 사회 걱정의 방향이 ‘저출산’이라는 표면적 사회현상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현재 진보와 보수 할 것 없이, 생산 현장에서 은퇴해 연금 등으로 생계를 연명하게 될 노인인구는 점차 늘게 되는 반면, 이들을 부양할 젊고 활력 있는 인구의 노동시장 진입은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한다. 때문에 우리의 미래가 더 큰 부담을 안게 된다는 위기론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모두들 지금 이대로라면 더 이상 현재의 사회시스템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조직 방식이 사회계약의 상(想)은 잡히지 않아 애태우고 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도 있다. 제작년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간 이세돌과의 바둑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당시, 수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은 점차 기계에 의한 인간 노동력 대체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소위 ‘노동의 종말’에 따른 실업 문제가 우리 사회를 골치 아프게 할 것이라는 걱정과 함께. 한편에서는 저출산으로 인한 생산가능 인구의 감소를 지적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기술에 의한 노동 대체로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인류의 과학기술과 그것이 동반하는 생산성이 발전이 인간 사회의 생산능력 자체를 향상시킬 것은 분명해 보인다만, 점점 늘어만 가는 노령층을 부양하고 이들을 대신해 일할 새로운 세대는 그 수가 부족하다고 한다. 다시 되묻는다. 왜 반드시 젊은이들만 노인네들을 먹여살려야 하는가?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자본은 투입 이후 얻게 되는 초과이윤으로 스스로를 증식해야만 생존이 가능한 존재다. 그리고 그 초과이윤은 노동력에서 발생한다. 맑스가 언급한 바, 투입된 비용(임금)보다 더 높은 생산량을 가져다주는 노동력이라는 생산수단이 바로 이를 가능하게 만든다. 노동력은 임금으로 지불된 자신이 가치를 온전히 상품에 이전할 뿐 아니라 잉여가치도 덤으로 얹는다. 기술이 발전해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단위 노동이 가져다주는 초과이윤의 양도 커진다. 그리고 생산 활동에 필요한 수 이상의 유휴 노동력이 꾸준히 노동시장에 존재해 산업예비군을 형성하면, 임금을 낮추는 방향으로 자본이 상당한 힘을 갖게 되는데, 기술의 발달로 다수의 노동이 단순화되거나 아예 대체되어 버리면 그러한 경향은 한층 더 강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데에 걸림돌이 있으니 바로 낮은 출산율이다. 분명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성이 증가하고, 사회 전체의 잉여노동도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은 자본의 이윤 획득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지만, 저출산에 따른 노동인구 감소는 이를 상쇄하는 힘이다. 그래서 나는 인구의 감소 전망과 관련해 언론, 학계, 정치인, 기업 등 오피니언 리더들이 진짜 걱정하는 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기반이 붕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라, 그저 현 체제, 즉 현재와 같은 생산-분배체제와 권력기반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정된 생산수단을 활용해 생산해 낸 사회 전체의 부를 100이라고 보고, 이중 전체 노동자들의 소득으로 배분된 몫을 55라고 하자(실제로 한국의 지지난해 노동소득분배율은 56.24%였다. 한국일보, 2018.8.15., “노동소득분배율 20년새 10%P 추락”). 지금까지 대다수 인구의 부양은 이 55 이내에서 해결이 되었다. 하지만 노동시장에 참여하는 인구가 점점 줄어들 계획이므로 임금의 수준이 지금처럼 그대로 결정된다면, 총생산 중 노동자에게 돌아갈 몫도 당연히 줄어들 것이다. 45가 될 수도, 35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만들려면 사회 전체의 부(富) 중 노동의 몫이 더 늘어나야한다. 현재의 55 만큼 주어지는 몫을 60, 65와 같이 재분배하는 방향으로 가야하고, 노동이 아닌 재산에서 파생되는 막대한 부를 억제해야 한다. 만약 사회 총생산에서 재산 소득의 몫이 45 또는 35로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불로소득이며, 특권적인 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소유다. 현재와 같이 생산수단을 소수의 개인이나 집단이 독점적으로 점유하고, 부의 분배도 자본의 초과이윤을 일정 수준 이상 보장해주고 난 이후에야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현재의 체제에서는 점차 가시화될 인구절벽에 따른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렵다. 다가올 문제들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면 정말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이 분명한데, 그 문제는 사회적 부의 생산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사회의 총 생산역량의 결실을 적절히 분배하는데 실패해 문제를 악화시킬 것이 자명하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그에 대비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소유, 분배 패러다임을 지금부터라도 고민하고 연구해야한다. 우선은 독점자본가의 사유재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생산수단의 소유형태를 보다 공유된 형태의 소유로 만들고 생산의 결실도 보다 균등하게 나눠 갖는 소유-생산-분배 형태를 점차 확대시키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초과이윤을 재원으로 해 기본소득 등 보편적 수당의 확대 지급도 추가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치이고, 현 체제에 대응하는 정치세력들 역시 반대, 그 다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결국 사람 먼저다. 한국사회는 이 사회 각 구성원-특히 여성의 몸을 국가가 요구하는 재생산의 틀에 맞추려 갖은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노력은 국가와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보다 개인의 행복을 더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이 확립되고, 이를 억압하는 어떠한 행위에도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의 태도로 인해 물거품이 될 것이다. 어떻게든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출산한 아이에 대한 선별적 지원을 확대하고, 이러한 의도에 반대되는 낙태죄를 계속 유지하려해도 소용없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더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만, 점점 더 불행해지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아이를 가지는 순간, 우리는 개인의 행복을 완전히 포기해야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내가 몸을 아파서까지 세상에 태어나게 만든 한 생명 역시 행복을 보장받는 주체가 아니라 사회 유지의 도구로서 대우받을 것이 뻔한데, 과연 누가 자신의 삶, 자녀의 탄생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인가. 그렇게 설계된 사회, 인간을 (생산)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세상에서 현실 인식이 바뀔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은 그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억지를 쓰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동안 어떻게 하면 이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지를 고민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지금 세상을 재설계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절실히 필요하고, 이를 위해 사회적인 소유와 생산양식, 부의 분배방식도 꾸준히 논의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최저임금 조금 오른 것을 가지고 경제가 엉망이라며 성토하는 몇몇 언론기사와 논평을 읽어보면, 우리 사회가 갈 길은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삶-정치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우리의 과제다.     


2018.9.8.

82년생 김지영 씨와 더불어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김지영 씨와 더불어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2016년 출간 이후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고 있고, 많은 이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책. 한편에서는 수많은 대중들의 마음속에 울림을 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이 덧씌워지고 분노어린 남성들로부터 공격당하기도 하는 책. <82년생 김지영>을 지난 주가 되어서야 한 번 읽어봤다.

 

82년생 김지영 씨는 누구인가? 김지영 씨는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해서 쓰여지게 되었는가? 이 책을 읽고 당장 내 머리 속에서 가장 많이 맴돌았던 질문이었다. 김지영 씨는 특정한 누군가를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김지영 씨와 동일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30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내가 바로 그 김지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살아오면서 보아왔던 할머니, 어머니, 누나들, 여성 친구들의 삶이 이 소설 속 김지영 씨의 할머니, 어머니, 언니 그리고 김지영 씨 본인의 삶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누군가 말한대로 김지영 씨는 우리 일상의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특별한 인물이거나 또는 그와 반대로 작가가 만들어낸 개별 현실에 속에서만큼은 실제로 살아있을 것만 같이 생생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인간을 허구적 인물이라고 지칭하는데, 김지영 씨는 그렇지 않다. 도리어 김지영 씨는 흡사 다큐멘터리나 르포에 등장하는 사회 일반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일종의 통계적 표준 모델을 스토리로 구성한 것처럼 이 소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살아나간다.

 

엉뚱하게도 내 머리 속에서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소시민 여성 한 명과 수천, 수만 군중들을 지배하는 절대자 간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어 보임에도 말이다. 리바이어던은 멀리 보아서는 왕관과 검을 쥔 단 한명의 거인으로만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보아야 비로소 그 거대한 몸체를 형성하는 수많은 사람 개개인을 볼 수 있다. 성격은 다르지만 김지영 씨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우리 시대 여성의 하나의 표상이지만 또 그녀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그 동시대를 살아온 수많은 개별적 여성들의 삶이 그녀 속에 녹아있음을 읽을 수 있다. 다만 리바이어던을 이루는 각각의 인간들은 개별적으로는 그저 개인의 생존만을 갈망하며 만인에 대해 적이 될 뿐인 늑대(사회화되지 못한 존재)에 불과할 뿐이지만, 김지영 씨를 이루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은 대체로 그녀들보다 더 강한 권력을 쥔 남성들이 만든 질서 속에 순응하거나 저항하거나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등 고도로 사회화된 존재로서 현존한다. 어떤 의미에서 김지영 씨는 리바이어던의 역방향이다. 김지영 씨는 개별 여성들의 삶과 삶이 모여 응축된 실체임에도 현실에서는 어떠한 힘도 발현할 수 없고, 어떠한 권력도 가지지 못한다.

나는 남성의 입장에서 김지영 씨의 삶을 읽으며, ‘과연 모든 여성들이 김지영 씨와 동일한 경험을 하며 살아가는가?’, ‘한국사회에서 모든 여성들이 필연적으로 김지영 씨와 동일한 경험을 할 것이라고 너무 일반화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반발감이 문득 들었다. 많은 남성들이 나와 같은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모든 여성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은 아닌데?’와 같은 반문을 던졌던 것은 그 이유 때문이리라. 그러나 작가는 작품 곳곳에 표기된 각주를 근거삼아 그저 말할 뿐이다. 우리 사회를 살아온 보통 남성들은 여성(그리고 소수자의 삶)을 날 것으로 볼 때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때로는 어머니, 누이, 여성 친구 등 자신 주변의 여성들의 삶을 흘깃 보면서 부정하기 힘든 일부 사실이 있고, 이것에 대해 약간의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도 이 세상 속에 살면서 그것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기에,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 삶이 비도덕적이었음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에, 남성들은 끝내 자기를 정당화하고자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다.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오직 일부 승자만이 양질의 사회적 자원을 독식하는 무한 경쟁의 시대,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불안정의 시대에서는 부양하고 보호할 능력을 갖춘 마초가 될 수 없는 수많은 남성들이 점차 커져가는 상실감을 마음에 품으며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남성)들이 서있는 그 열악한 사회적 위치마저도 여성과 그 외 여러 사회적 약자의 희생 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계급, 출신 지역, 가정환경, 그리고 개인의 천부적 재능 차이와 각자의 선택에 따라 우리 사회의 개별적인 여성들의 삶들은 다양하게 전개되고, 제각기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김지영 씨는 우리 사회 여성들의 삶의 일종의 교집합과도 같다. 우리 어머니들이 살아가는 동안 적나라하게 경험했던 남존여비의 가치관과 그에 따른 차별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가사일의 참여에서 시작되는) 다른 잣대로 요구되는 역할의 차이, 언제나 남성의 시선에 대응하는 성적 대상이 된다는 것,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경제적 보상, 사회적 상승의 기회의 차이, 자연스러운 것인양 떠맡게 되는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의 힘듦과 그 힘듦 상관없이 받게 되는 비하와 조롱 등은 지금 내 또래인 30대 여성들에게조차 당연하듯 받아들여져 온 일이기도 하다. 김지영 씨의 삶은 우리 사회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지언정, 적어도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가능성이 거꾸로 남성에게도 해당되는지 여부를 생각해본다면, 그 대답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장하지만, 정답이 어디에 있는지는 정말 찾기 어렵다. 내 머리 속에서도 뚜렷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를 통해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를 만드는 것 등이야말로 그 답을 찾는 과정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보다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조망하는 여러 장르의 글들, 영상작품들, 기타 문화컨텐츠들이 많이 기획되어 대중들의 마음에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를 희망한다는 바램뿐이다.

 

2018.7.2.()에 씀. 


예멘 난민을 둘러싼 논란 – 더 좋은 사회를 위한 기회로 바라봐야

예멘 난민을 둘러싼 논란 더 좋은 사회를 위한 기회로 바라봐야

 

어느날 갑자기 그동안 한국에게는 멀고 낯설기만 했던 예멘이라는 나라에서  500명이 넘는 사람이 찾아와 난민 지위가 인정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후티 반군과 하디 정부, 그 배후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대립, 알카에다와 이를 소탕하려는 미국 등 머리가 아플 정도로 어지러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간의 갈등과 대립에 따라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그 혼돈의 땅에서 벗어나고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를 거쳐 무사증 입국이 허용된 대한민국의 섬, 제주도에까지 찾아온 것이다. 한국 정부는 갑작스런 난민 유입에 당황한 나머지 이들 500여 명에 대해 출도금지 조치를 내렸고, 난민들은 제주도에 발 묶이게 되었다.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고 하던가. 신자유주의 광풍 이후 무한 경쟁과 불안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타인을 받아들일만큼 주머니 사정도, 마음 씀씀이도 넉넉지 못하다. 타인에게 관대함을 베풀만한 베포와 자신감과마저도 남아 있지 않은 우리사회는 행여 낯선 이에게 무엇인가를 빼앗기지는 않을까, 그들이 우리를 해치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한편에서는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기 위해 들어온 가짜 난민이라는 주장에서부터 그들이 이슬람 특유의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으로 말미암아 몇몇이 테러리스트 전사가 되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이번 예멘 난민의 다수가 남성이고, 무슬림들의 남성우월주의 문화로 말미암아 이들이 우리나라 여성의 안전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걱정도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난민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으며, 무슬림 남성에 대한 공포와 편견어린 시선이 마치 객관적인 진실인양 호도되고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한 여론조사기관은 제주 난민 수용 찬반을 묻는 전국 여론조사에서 반대’49%, ‘찬성’39%로 난민 수용반대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음을 강조했다.(역설적이게도 이 전국 단위여론조사에는 정작 예맨 난민을 직접 보고 접하는 이들인 제주도민들 의견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 반대 측에서는 난민들에게도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며, 한국 정부와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난민을 수용해야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정부가 예멘 난민의 추가 유입을 막기 위해 무사증 입국이 제한 국가 목록에 예멘을 포함시켜 예멘 난민신청자의 탈출 통로를 봉쇄했으며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도 져버렸다고 비난했다. 정부가 어렵게 입국한 예멘인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하는 출도금지 조치를 내려 제주도에 고립시킨 것 역시 난민의 어려움을 배가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이 난민 협약에 조인했음에도 난민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인력과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것도, 난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공포심을 조장하는 언론의 태도 역시 인권을 옹호하는 자들에게는 주요 비판 대상이다. 극우적인 성격이 강한 한국 개신교 사회의 이슬람 혐오증과 함께 다름 인정이 되지 않는 한국사회의 배타성, 인종주의적 편견 역시 비판의 지점이 되곤 한다. 난민을 받아들여야하는 당위는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며, 한국 정부 역시 그러한 뜻에 동참하기로 국제사회에 약속했기에 이를 준수할 의무가 있다는 주장도 들려온다.

 

이 두 개의 서로 충돌하는 주장-‘국내 사회질서의 안정과 내국인 안전보장을 위해 난민 유입은 불가’ vs ‘보편적인 인권의 추구와 난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의 당위성은 각자 자신이 더 옳다고 주장하며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긋고 계속해서 대립한다. 그런데, 대중의 불안을 조장하며 권력을 유지하는 정부기관과 언론, 그리고 주요 종교는 난민 문제를 자기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고 있으며, 이들이 대중을 후자보다는 전자 쪽의 생각을 갖도록 이끌고 감에 따라 그 근거 없는 공포심은 날로 증폭되고 있다. 난민에 대해 보다 호의적이며, 개방되고 우애가 있는 사회를 만들려는 입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면 반드시 정부, 언론, 종교 권력에 대항해 대중·시민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상황을 보면 더 풍부한 이야기와 설득력 있는 주장의 근거들을 제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선 앞서 말한 (주로 육지인들의) 두 평행선이 담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단초가 될 수 있다. 몇몇 언론이 소개한 바에 따르면 상당수의 제주도민이 육지인의 우려와는 달리 예멘 난민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지낼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후원과 자원봉사를 통해 예멘 난민들에게 생필품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일부는 거처를 마련해주어 함께 지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멘인들 역시 그냥 농담 좋아하고, 상대방에게 예의바른 평범한 사람이며, “이슬람 문화 특성상 하루 다섯 번 기도하고 할랄푸드를 먹는 점을 빼면 한국 사람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느끼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한다. 일자리와 먹을거리가 없는 예멘 난민들이 일시적으로 제주도내 일손이 부족한 곳에 연결되어 일을 하는 모습이 기사화되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 산업이 발전하지 않았으며 그 경제·사회 공동체가 그리 크지 않은 제주도에 적지 않은 수의 예멘 난민들이 발 묶여있는 한, 이들을 수용해야하는 제주도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결코 예멘인의 본성은 우리와는 사뭇 달라 서로 맞지 아니하여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한 섬에 난민들을 가두어버리고, 그 섬의 주민들로 하여금 난민 수용의 책임을 전가하는, 그러면서도 난민을 아직 접하지 않은 시민들의 공포심을 방관하면서 이를 통해 현 상황을 유지하려는 국가 권력이 그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이 있다.

 

내가 의아해하는 것은 난민 수용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을 만들기 위해 또 다른 차원에서 제기할 수 있는 부분, 즉 가능한 한 난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사회에 어떠한 긍정적인 효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은 왜 그리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해서이다. 사실 당위성에 대한 주장을 강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당장 일상의 삶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우리 시민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우리 사회를 보다 개방적인 곳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의 발전과 우리의 삶의 질 향상에 어떠한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것인지 전망하고, 그 청사진을 제시해야한다. 올바른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고 언제나 할 수 있지만, 향후 전망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 그것은 비단 이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이번 일과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비록 난민 문제가 아니더라도 이미 한국 사회는 다양한 이주민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으며 세계화 시대에 그 현상은 더 가속화될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비정부 기구인 텐트 재단의 브리핑에 따르면 난민을 받아들이는데 투자한 1유로가 5년 이내에 2유로의 경제효과를 낳게 한다고말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호주 통계청 보고서를 인용해 인도적 차원에서 받아들인 난민은 일반 이민자들보다도 훨씬 강한 기업가적 성향을 보여줬다며,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익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당장에 저출산으로 미래의 노동력 부족을 걱정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새로운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막연히 가지고 있는 외부인에 대한 공포심, 일자리 상실 문제, 치안에 대한 우려는 사실 이주민의 유입 이전에 우리 사회의 개방성의 수준, 경제적 독점과 양극화, 평화와 신뢰가 담보되지 않은 사회 구성원들 간의 관계와 갈등이 만들어낸 우리 안의 괴물이지 바깥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다. 난민 수용이 곧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되려, 난민들을 받아들임을 통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영향은 비단 당장의 경제적 효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들이 잘 정착하기만 한다면 한국사회를 더욱 다양하고 역동성이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다. 다양한 인종, 문화가 융합하면서 만들어내는 창의력은 향후 우리 사회의 자산이자 경쟁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일례로 실리콘밸리의 IT 혁신과 창의성은 이주민에 대한 개방성과 포용성이 기반으로 성장했음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번 예맨 난민 유입을 계기로 난민 수용의 당위성을 넘어, 난민 수용이 우리 (시민)사회에 던져준 과제, 효과 등에 대해서까지 보다 포괄적으로 논쟁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우리 이웃의 삶을 우리가 책임져야만 하는 이유

- 켄 로치의 영화 , 다니엘 블레이크와 바우만의 책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Individualized society”를 읽고 생각하다 - 

 

지난 달에 켄 로치 감독의 영화 , 다니엘 블레이크를 봤다. 5월에 있었던 칸 영화제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영화에 담아온 노장에 대한 찬사와 함께 황금종려상이 수여된 영화이기도 하고, 서구 복지제도의 위축과 그 폐해가 인간 존엄성의 파괴를 잘 그려내었다는 몇몇 평도 있었기에 기대하고 보았다. 이미 오래 전이긴 하지만 그 감독의 영화를 몇 편 보고 느꼈던 감흥이 생각나 그 때의 느낌을 떠올리며 화면 앞에 앉았는데, 영화를 보고 난 후 느낌을 말하자면 예상보다 솔직하고 담백하고 간결하게 연출해 좋았다. 특히 영화의 주인공 댄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 마지막 장면은 어떠한 극적인 효과도 없어 허무하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마치 지금 우리 시대에서 인간존엄성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허무한 일이라고 감독이 의도한 것인 양 내게 느껴졌다.

 

나는 사회권의 가치와 사회복지체제의 구축은 노동자, 시민의 연대와 투쟁, 그리고 그에서 비롯한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분명 국가나 자본의 입장에서도 노동력의 재생산 차원에서 사회복지제도의 필요성을 인지했고, 그 덕에 보다 적극적으로 복지정책이 제도화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의식, 그러한 정책이 시혜적인 차원이나 도구적인 차원이 아니라 한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할 보편적인 권리로서 받아들여진 것은 오직 노동자, 시민 등 주체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요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이제 또 다시 그 보편적인 권리가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은 시대, 개인 스스로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로 후퇴했다. 인간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또 다시 (필요성에 국한한다는) 도구적 개념 혹은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구휼 같은 것이라는) 시혜적인 개념으로 되돌아갔다. 효율성, 경제성, 비용절감이라는 이름의 망령은 이미 구축되어 있는 모든 사회적 안전 기반을 허물어트리고, 그 자리에 보통의 사람이라면 닿을 수 없을 정도의 높이로 견고한 담을 쌓는다.

 

여러 사회적 요구와 그에 부합하는 정책을 억누르는 신자유주의에서 비롯해,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권력은 감세와 더불어 사회서비스도 시장으로 외주화하고, 시장에 나온 사회서비스는 오직 게으르고 쓸모없는 인간들의요구를 어떻게 하면 차단하고 잘라내서 비용을 줄일지 궁리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원칙과 규정은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밀어내기 위해 그어진 선(line)이다.

극중 인물인 케이티가 상담시간에 불과 몇 분 늦었다는 이유로 제재대상에 올라 사회보조금 대상자로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케이티는 두 자녀를 둔 싱글맘으로 변변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 도시 이주자이다. 누구보다도 사회의 지원이 절실한 그녀에게 당국의 관료는 원칙상 안 된다고 잘라 말한다. 가부를 결정하는 차이, 그리고 그에 따라 대상자에서 배제하는 그 방식에 부여된 기준은 어떠한 윤리적인 판단보다 우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우만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사회의 사회복지업무는 점점 규정을 지킨 정도에 따라 그 적합성이 평가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고, 그 결과 일상적인 사회복지 업무는 본래의 윤리적 기반에서 점점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절대적인 확실성은 절대적인 무책임과 같다. 미리 제시된 지침을 적용하고 실현하는 데 집중하는 사람보다 더 배려심 없는 사람은 없다(지그문트 바우만, 홍지수 역,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Individualized society, p.136)

 

과거 황금기 시절 높은 수준의 사회복지를 이룩했으나 대처 시절에 많은 제도적 전통이 파괴된 영국의 경우, 그 이전과 이후 간에 느껴지는 차이의 정도는 우리사회의 그것보다 더 극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더 비참하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억압과 압제를 이겨내고 사회적 권리가 겨우 논의되고 제도화될 수 있는 환경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외환 위기의 폭풍이 사회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렇게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과 관료와 그들을 후원하는 기업들의 논리가 도처에 뿌려졌다. 우리는 언제에야 비로소 계속 유보되어온 보편적 사회권의 보장을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화시킬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시민이라기보다는 경제인으로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개인임을 넘어 연대하는 주체로서 정부 권력의 작용을 감시·제어하고, 권리를 요구하는 그런 시민이 아니다. 그보다는 개별적으로 시장에 참여해 본인이 가진 능력과 자원에 따라 그 대가를 받고, 그 차이에 따라 제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라고 강요받는 파편화되고 개별화된 개인이다. 인간이 누리는 사회적 권리는 사라지고, 시장의 수요·공급 법칙에 따른 거래의 대가만이 우리 손에 쥐어진다. 책임은 개인의 몫이다. (노동) 시장에 참여하고 그 책임을 다하는 나. 그럼에도 넉넉하지 않은 삶에 허덕이는 것은 오직 개인의 손으로 해결해야하는 몫이다.

 

역시 바우만이 말한 바, 대량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시대가 저물어가기 때문에 국가가 노동력을 재생산해야할 필요성도 예전보다는 퇴색되고, 보편적 복지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동기도 생각보다 잘 붙지 않는다. 그럼에도 실업율의 상승은 또 사회적 불안감을 완화하기 위해서라도 복지수준의 향상을 요구하지 않을까. 하지만 여전히 복지정책은 오직 소수의 낙오자, 몇몇 기준에 따라 낙오자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실행되고 있다. 그런데 불안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나는 열심히 일하지 않고서도, 능력도 없으면서도 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을 경멸한다. 나는 기꺼이 불안과 희생을 감수하는데, 왜 나는 받지 못하는 것을 그들이 받게 되는가에 대한 손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들, 빈곤층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미움이 커진다. 사회적 연대감은 생기기도 전에 이미 와해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진정한 의미의 사회서비스가 그 누구도 누리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리면, 그 제도는 불신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에 기꺼이 동의하고, 기꺼이 세금을 낼 사람들의 수가 줄어든다. 재원이 줄어들면 지출구조의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감축의 압력은 더 강해진다.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보편적인 권리는 몇몇 외부서비스 업자의 재량권에 의해 재단되어 잘려져 버린다. 이 모든 것들이 합리적 기준과 규정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도대체 어디에서 그 판단의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인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도대체 왜 우리는 충분히 가난한지, 충분히 선량한 사람인지 여부를 스스로 증명해야만 하는가. 내가 한 사회의 구성원이자 시민이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는 왜 충분하지 않은가. 그리고 어떠한 근거에서 그것을 판단할 권능이 당국(또는 외주기관)에 주어진 것인가? 그 어떤 정당성도 없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그 권능에게 구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그 구걸을 감당할 수 없는 자아를 가진 개인들, 혹은 그 구걸하는 절차 자체에도 접근할 수 없거나 그 길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개인은 인간다운 삶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으로 내 몰리게 된다. 그 자격 있음의 조건은 도대체 누가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가.

 

효율성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정도를 뜻하는 개념임을 생각해볼 때, 자격을 따지고 쳐내는 방식의 복지는 오히려 비효율적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비용절감을 목표로 복지 정책 본연의 임무 즉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라고 하는 그 효과 자체를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몇 년전 나는 한 지인과의 무상급식을 놓고 이야기 적이 있었다.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그의 논리의 요지는 부자에게도 공짜 밥을 나눠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그렇게 나누면 반드시 교실 내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하는 바, 위화감 없이 그 부자와 부자가 아닌 사람은 어떻게 나눌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그는 모양이 똑같은 카드를 만들어 찍게 하고 시스템이 자동으로 구분하게끔 고안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 되물었다. 차라리 그 시스템을 만들 비용으로 혜택을 골고루 나누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바우만은 이 문제는 결국 윤리의 문제라고 하며, 현재 윤리를 절차가 대체해버린 것으로 문제를 진단했다. 결국 절차가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배제해버리고 잘라버리는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것은 사실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를 둘러싼 권력의 작동 방식과 관련이 있다. 누구나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회적 합의와 상호 신뢰, 그리고 연대의 세계관을 해체하면, 남는 것은 결국 시장에 홀로 남겨진 개인 밖에 없다. 개인의 삶의 질은 시장참여를 통해 획득한 것만큼만 확보 가능한 것이며, 그로부터 성공할지 도태될지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라는 생각이다. 사람을 사회적 동물이 아닌 경제적 동물로 치환하려는 세계관이며, 우리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라는 신호이자, 그로부터 얻은 만큼이 바로 너희들의 분수라는 메시지이다. 따라서 복지를 둘러싼 논쟁은 사실 비용과 경제적 이해관계 문제를 넘어 어떠한 가치관이 우리 시대의 주요 사고방식을 결정하느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담론의 전쟁이기 하다.

 

그래서 우리 이웃의 삶이 더 이상 비참해져선 안 된다. 그것은 비단 그 사람의 문제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이며, 궁극적으로는 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더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이웃들의 삶도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는 인식이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야 가능하다.

복지는 정부가 국민에게 주는 시혜가 아니며, 말 그대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시민에게 반드시 주어져야만 하는 기본권으로 인정해야 함이 마땅하다. 권리는 가치와 윤리 차원의 문제이다. 사회가 우리 이웃을 책임지고 보살펴야 하는 당위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따로 필요하지 않으며 오직 인간으로서 주어져야할 기본적인 권리라고 하는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또한 기본권은 나누고, 분리하고, 배제해서 차등적으로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보편적인 권리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댄은 결국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가장 일상적인 것 아래에는 가장 정치적인 현실이 존재한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으로 돌변할 때

2017.5.2에 생각한 것을 쓴다 


노동절에 크레인에 깔려 죽은 비정규직 사람들

노동자들은 언제나와 같이, 아님 조금은 투덜거리는 태도로 일터로 나섰을 것이다. 평소보다는 좀더 피곤했을 수도 있다. 긴장감이 풀렸을 수도 있고. 여튼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 차마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불가항력 속에 자신들의 목숨이 곧 위태로워질 것을.... 노동절 저녁, 이 소식을 전한 한 신문기사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날 삼성중공업 직원들은 노동절을 맞아 쉬었고, 피해를 당한 노동자들은 모두 사내 협력업체 직원들이었다.” (2017.5.1. 한겨레신문, “노동절 조선소 하청노동자 덮친 타워크레인 30명 사상”)

 

그리고 오늘 찾아간 곳, 성주 소성리

평범한 산골 마을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농사를 짓고 있고, 특별히 관광객이 올만한 곳도 아니다. 교통의 요지가 아니다. 아마도 평소 이곳에 사는 사람들 외에는 명절날에나 찾아오는 아들·손주가족 혹은 참외 수확철에 물건을 실으러오는 짐차 외에는 오가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TV뉴스로만 들었던 사드(THAAD)라는 것이 이 고장에 들어온다고 하더니, 이웃 성주읍 사람들의 소식을 비롯해 몇몇 이들이 그것이 건강에 매우 나쁘다고 한다. 농사에도 차질이 있다고 한다. 외지의 활동가들이 이 땅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결의에 찬 얼굴로 들어온다. 그리고 이들을 막기 위한 경찰버스들이 좁은 길을 아슬아슬하게 줄지어 들어온다.

 

누군가 그랬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고. 그러나 가당키나 한 말인가. 우리에게 가장 사적인 것은 가장 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정치적인 것과는 멀어 보인다. 그저 우리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이자 먹고 삶의 현장이다. 조금만 더 고급스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에게 사적인 것은 정서적이고, 경제적인 활동들이 뒤섞이는 것이지 그리 정치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정치적인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만, 칼 슈미트의 개념대로 하면 동지와 적의 구분으로 설명될 수 있는 국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평소 우리가 느끼는 바, 삶이 고달픈 것은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현상. 자연은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과 자원을 스스로 개척해서 빌어먹고 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최소 투입 대비 최대 효용 즉 경제적인 이유가 현상을 지배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가장 원초적으로는 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성적 대상으로서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며,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무능하기 때문에 또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람과 사람 간의 때로는 사무적이지만 전반적으로는 어떻게든 정서적인 관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매우 중요한 틀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다일까?

 

하지만 일상의 삶은 그 이면의 더 큰 사회적 네트워크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그 큰 사회적 네트워크는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개인들 간의 연결만은 아닌 불평등하고, 권력에 기반한 거대한 매커니즘의 작동에 의해 형성되는 것. 그래서 일상의 노동현장이 고단한 것은 누군가 나의 고단함을 통해 이익을 취하기 때문이고, 현실의 편안함은 언제나 그 편안함의 이면에서 그것을 언제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어두움을 함께 안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것들이 가장 극단적으로 될 때, 다시 말해 표면적인 당연함이 그 아래 모순을 더 이상 감추지 못할 때, 거대한 불편함, 즉 갈등의 결정적인 순간이 등장한다.

지금껏 가장 단지 경제적이고, 정서적인 것에 불과해보이던 이 시공간이 어느새 정치적인 것으로 탈바꿈한다. 대립과 갈등이 발생하고, 그로서 너와 나의 전선이 분명해진다.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어느새 정치적인 것이 된다. 가장 사적인 것이 어느새 가장 공적인 담론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사실 정치적인 것은 없던 것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 정치는 부재한 것으로 보이나 그것은 일상이라는 표피 속에 언제나 은폐되어 있고 숨겨져 있다. 생명의 위협 또는 생사가 결정되는 문제가 발생할 때, 혹은 그 이전에 이미 사람이 위험에 처해질 때, 먹고사는 문제의 이해갈등이 매우 첨예하게 벌어지고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일이 생길 때, 우리는 우리의 삶 어딘가에 정치가 숨겨져 있었음을 그제에서야 알게 된다.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뒤늦게라도 깨달음을 느끼는 존재이기도 하다.

 

크레인사고와 관련해 삼성중공업에 유가족의 항의가 있었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중공업 사장이 피해유족을 찾아 사과도 했다고 한다. 사실 난 저 기사에서 정규직은 놀고 비정규직은 일했다고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노동절을 만끽하지는 못했다고 쓰는게 맞다고 본다. 억울함이 비로소 인간을 권리의 주체로서의 스스로를 깨닫게 한다. 사실 잃기 전에는 우리가 어떤 것을 누리고 있으며, 누려야 하는지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그것은 소성리도 마찬가지이다. 어느새 이곳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슈가 집중되는 곳이 되었다. 대통령, 국회 등도 이곳을 주시한다. 지역주민들은 이미 투사가 된지 오래다.

다시 나의 일상을 생각해본다. 단순히 정서적인 인간교류와 경제적인 계산이 지배하는 이 곳. 그런데, 그 지배하는 것의 이면에 가장 정치적인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현재의 상황을 단순하고 당연하게 만드는 그것의 이면에 다른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온 세상이 빙하로 덮인 곳도 빙하 아래 바닷물은 계속 순환하고 있다.

뒤늦은 깨달음의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정치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 혹은 가장 가까운 이들의 생명과 권리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그리고 일상이 정치적인 것으로 변모하기 직전에 우리는 가장 유리한 공간을 선점하고 그곳에 서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일상을 지킬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을 지키려면 역설적이게도 가장 일상적이지 않은(정치적인) 것을 일상 전면에 내세워야한다. 모두들 부디 그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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