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me


문제는 채용비리가 아니다

오늘 내가 일하는 단체의 메시지방에 포스터 하나가 올라왔다. 한 장의 웹자보였다. KT, 강원랜드, 중기공 등에 채용청탁을 한 것으로 알려진 정치인들과 청년수당 정책에 반대하는 보수야당 원내대표를 풍자한 그림이었는데, 몇몇 동료 활동가들은 재미있으면서도 분노가 치민다는 답글을 달았다. 적시에 게재돼 많은 이들의 공감과 재미를 불러일으킬만한 한 장의 그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번 웹자보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여러 채용비리 관련 뉴스를 보면서도 별다른 분노의 감정이 들지 않았다. 다들 부당한 일이라며 성토했고, 나 역시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한을 남용해 괜찮은 일자리를 자기 영역 안에 있는 사람에게 나눠준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내 마음을 뒤흔들고 화가 나게 할 정도의 문제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다들 잇따른 채용비리가 문제라고 하는데, 그 사실을 취재한 뉴스를 보고도 분노감이 들지 않는 난 이상한 놈인가? 


채용비리가 발생한 기업에 채용청탁이 발생하는 것 것은 이들이 (업무의 성격이나 분위기, 가치 등이 아니라 보수와 안정성의 측면에서) 매력적인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매력적인 직장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사회적 자원의 상당부분을 과점하고 있어 조직의 내부구성원들에게 더 많은 과일을 나눠주고도 이윤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직장을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러한 직장이 고용할 수 있는 피고용인 수는 한정되어 있다. 결국 사람들은 좁은 문을 두고 취업경쟁을 벌인다. 사회는 그것을 방조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인다. 이러한 전제에서 사람들은 그 좁은 문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한다. 경쟁에는 규칙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자원을 총동원해 경쟁에서 승리하고 싶어하는데, 이중 소수는 게임의 룰 자체를 패스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을 가지고 있어 룰을 지키지 않고도 쉽게 문을 통과한다.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그 좁은 문에 들어가기 위한 룰이 정해져있는데, 그 룰을 어기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더 넓게 생각해보자. 애초에 문제는 그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기본적인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 부의 배분이 왜곡되어 있고 편중되어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왜곡되고 편중된 부에 접근하기 위한 게임의 룰이 정립되어야 한다고만 말한다. 문제는 불평등인데, 자꾸 불공정에 대해서만 목소리 높여 이야기한다. 만약 청탁 행위가 원천 금지되고 오직 공개 경쟁 채용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보자. 그것만으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지나? 애초에 그 공정한 경쟁에서조차 이길 수 있는 유리한 환경에 놓여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조건 차이가 존재한다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러한 공정사회는 내게 필요 없다. 이미 짜여진 틀 안에서 작동하는 (불평등을 은폐하는) 규칙에만 얽매이면, 우리는 그 속에서 영원한 불안과 자기 보위만을 생각하는 노예 같은 삶 속에 갇힐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판을 바꾸어야 한다.


어떤 이는 우선 공정사회가 되고나서야 비로소 그다음 단계로 구조적 불평등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래 좋다. 기득권층에 주어지는 반칙할 특권을 제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전반의 사회경제 체제와 그에 대한 인식틀, 패러다임의 고민이 없으면 그 어떤 공정사회 실현을 위한 목소리도 허무하다. 사회가 계속 불평등한 이상 불공정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이다. 그래서 공정사회만을 부르짖는 주장은 현 제도의 정상기능 범위에 매몰된, 지극히 보수적 선택지만을 보겠다는 시각에 불과하다


쓸모가 곧 가치의 잣대가 되는 사회를 비판한다

쓸모 여부가 곧 가치 여부의 잣대가 되는 사회를 비판해야 한다

-한 동물권 옹호 단체의 동물 안락사 논란에 대해



 지난 1월 11일 동물권단체 케어에서 자신들이 구조한 동물들을 비밀리에 안락사시킨 사실이 한 내부제보자에 의해 폭로되었다. 많은 언론에서 이를 비중 있게 보도했고, 수많은 동물보호론자, 동물애호가, 그 외 동물의 생명에 대해 온정적인 감수성을 가진 수많은 시민들이 이에 분노했다. 케어의 대표인 박소연은 지난 수 년에 걸쳐 동물소유주의 사유재산권 침해라는 법적 경계를 넘나들면서까지 열악한 환경에 처한 수많은 동물들을 적극적으로 구호했고, 그에 따라 급진적인 동물권 활동가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2016년 한 뉴스는 다수의 품종묘들을 어떠한 위생적인 관리도 없이 좁은 철장 속에 가둬놓고, 내다 팔 새끼고양이만 무한 번식하도록 운영되는 번식원 실태를 취재했는데, 해당 기사에서 박소연은 그러한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멘트를 했다. 그러한 환경에 감금된 동물의 구호한다면서 정작 구호된 동물은 안락사시킨 박소연의 행위는 모순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박소연은 이번 논란에 대해 지자체 보호소와 같은 대량 살처분이 아닌 인도적 방식의 안락사였고, (오해가 있을까하여) 알리지 못한 점은 사과한다며, 안락사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정당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해명에 동의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사태에 대한 많은 이들이 공분 그 자체에 대해 약간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 그 현상 자체에 대해서만 분노하는 것이 아닐까? 분노를 넘어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점은 없을까. 사건은 독립적으로만 발생하지 않으며, 그 기저에는 맥락이 존재하는 법이다. 나는 현상을 넘어선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침 나는 그 주 주말에 별도의 고양이 공간을 운영하는 한 책방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 곳의 주인으로부터 고양이 번식원에서 필요가 없어진 고양이는 안락사당하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책방 주인은 본인이 데리고 있는 고양이들을 가리키며, “이 녀석은 번식원에서 폴드종을 만들기 위해 데리고 있던 녀석인데, 새끼들의 귀가 계속 안 접혀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새끼들을 만드니 (원하는 품종을 생산하지 못하는 씨앗고양이인) 이 녀석도 쓸모없다는 이유로 안락사 될 처지였는데 우리 집에 데려왔습니다. 이 녀석도 번식원에 오래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건강한 새끼를 만들기 어려우니 안락사 될 운명이었는데, 여기로 데려온 것이지요.”라고 말했다. 

 동물이 가진 여러 특성들, 특정한 형질은 실상 인간이 자신들의 지식 기준에서 경험적인 데이터나 자신들이 구분 가능한 특정한 기준에 의해 분류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분류된 것 중 특정 부류는 인간이 좋아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상품으로서 높은 가치를 부여받아 가까스로 살아남는 반면, 특정 부류는 인간이 좋아하는 특성을 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상품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평가를 받고 그에 따라 죽임을 당한다. 인간이 원하는 모양새의 새끼를 낳지 못하거나 건강한 새끼를 낳지 못하면, 그 원자재는 폐기된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감정(귀여움과 사랑스러움, 그렇지 않음)을 충족할 대상을 만들기 위해 서 그 대상을 명확히 만들기 위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개체를 구분하는 선이 그어지고 그에 따라 기준에 부합하는 대상의 특성이 형성된다. 그렇게 형성된 ‘대상’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 타인이 쉽게 가지지 못한 것을 나는 가지고 싶어 하는 허영심과 지위 욕구, 욕망과 허영심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려는 물욕 등이 뒤따른다. 이 과정에서 생명 존재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고 작용과 타 존재의 고통에 공감하는 감수성이 자리할 여지는 없다. 한번 인간 욕망의 대상으로 포획된 존재나 또는 그 대상을 만들 재료로 쓰여질 수 있는 존재는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상관없이 생산, 거래, 사용되는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소유와 효용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그 대상에는 물론 인간도 포함된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나는 이번 사건에 대한 반응이 행여나 한 동물권 옹호 단체와 그 대표 활동가의 도덕성에 대한 단순한 비난, 처벌 요구에 국한되지는 않을까하고 우려한다.  우리는 그 것 이상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많은 동물애호가들이 구호활동을 옹호할 정도로 ‘잉여’동물이 많이 존재한다. 심지어 동물권을 옹호하는 활동단체마저 구호한 동물을 감당하지 못해 죽일 정도로 ‘잉여’동물이 많이 존재한다. 그 근원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할까.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사회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이 아닐까. 모든 존재가 그 자체로서 가진 가치를 부정하고, 오직 인간 욕망 실현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냉혈한 사회 말이다.    


 문득 유기동물들을 챙겨주는 사람들이나 동물권 옹호자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생각해보았다. 이들은 길고양이 먹이를 챙겨주는 이들을 캣맘충이라 일컬으며 조롱하고, 바로 그 캣맘충이 보살피고자 하는 개체가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사람은 개와 고양이는 귀엽다고 반려동물이라고 대우를 받는데, 왜 소, 돼지, 닭은 고기로 죽임을 당하는데 문제제기 하지 않느냐고 따진다(물론 이들 중 대다수는 공장식 축산업에 대한 이해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나는 이들과 생각이 다르며 이들의 주장을 옹호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이해는 간다. 일부는 정말 알 수 없는 마음의 근원에서부터 동물을 혐오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는 근원적인 증오라기보다는 아니꼬움에 가깝다. 이 아니꼬움의 감정은 상대방의 행위가 이율배반적이라고 느끼면서 생겨난다. 생명을 존중해야한다고 말하지만, 특정한  존재의 가치는 옹호하는 반면에 다른 존재의 가치는 배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 뒤따른다. 배제되는 존재는 누구인가? 그것은 나 자신이다. 우리 사회의 상당히 많은 영역에서 인간은 주인이 아니라 수단으로 격하되고 소외를 경험하기 때문에, 존중받고 싶지만 존중받지 못한 ‘나’의 마음 속엔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 분노로 찬 자아에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옹호할 아량과 여유는 자리 잡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옹호하는 존재이든, 배제하는 존재이든 간에 상관없이, 모든 존재는 그것을 판단하는 우리의 자기중심적 시각에 갇혀진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대상의 목록에서도 우리 자신은 배제되는 존재에 가깝다는 것이 문제이다. 문제의식은 점점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다시 한번 나는 이번 일이 우리의 삶,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행하는 방식 그 자체에 대해 성찰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분노와 안타까움이라는 1차적 공감이 동물권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이것이 다시 인권에 대한 인식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방식이나 가치의 우선순위, 패러다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저출산과 고령화, 그것만이 진짜 문제일까?

지난 주에 두 가지 뉴스가 내 눈에 띄었다.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생산가능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고령인구의 빠른 증가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통계청의 ‘2017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됐다. 한국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인구구조의 변화는 단기간에 바꾸기 어려운 수준인 만큼, 사회 각 분야에서 인구 감소를 전제로 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겨레신문, 2018.8.28., ‘한국인 반감기’ 100년 뒤 2600만명뿐…빨라진 ‘인구감소 시계’)

“보건복지부는 지난 17일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 일부 개정안을 공포했다. 이에 근거한 행정처분기준을 보면 ‘비도덕적 진료행위를 한 경우’에 ‘형법 제270조를 위반해 낙태하게 한 경우’가 포함돼 있다. 이에 해당할 시 자격정지 1개월에 처해진다. 
… 최근 임신중단 합법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연달아 열리고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3만명을 넘기는 등 낙태죄 조항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민우회는 “보건복지부는 임신중지를 ‘비도덕적’이라 규정하며 오히려 여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강화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게 여성은 국민이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 
(경향신문 2018.8.23., “임신중절이 ‘비도덕 진료행위’? 박능후 복지부 장관 사퇴하라”)

 저출산과 고령화가 향후 우리사회의 존폐를 결정짓는 중대한 사회적 과제가 될 것이라는 말은 지난 십 수 년 동안 반복해서 들어왔기에 더 이상 새롭지도 않다. 다만 (도대체 어디에 쓰였는지도 모르는) 100조가 넘는 막대한 정부 재원이 지출되었는데도 그러한 경향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같은 방식으로 이 사회의 재원을 낭비하는 정치인, 관료들의 안일함, 무책임성이 더욱 놀라울 뿐이다. 올해 한국의 출산율은 세계 최초로 0.9%대에 진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내가 두 다리를 디디고 살아가는 이 사회의 극단적인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란다.    
 그러나 문득 우리 사회 걱정의 방향이 ‘저출산’이라는 표면적 사회현상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현재 진보와 보수 할 것 없이, 생산 현장에서 은퇴해 연금 등으로 생계를 연명하게 될 노인인구는 점차 늘게 되는 반면, 이들을 부양할 젊고 활력 있는 인구의 노동시장 진입은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한다. 때문에 우리의 미래가 더 큰 부담을 안게 된다는 위기론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모두들 지금 이대로라면 더 이상 현재의 사회시스템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조직 방식이 사회계약의 상(想)은 잡히지 않아 애태우고 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도 있다. 제작년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간 이세돌과의 바둑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당시, 수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은 점차 기계에 의한 인간 노동력 대체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소위 ‘노동의 종말’에 따른 실업 문제가 우리 사회를 골치 아프게 할 것이라는 걱정과 함께. 한편에서는 저출산으로 인한 생산가능 인구의 감소를 지적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기술에 의한 노동 대체로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인류의 과학기술과 그것이 동반하는 생산성이 발전이 인간 사회의 생산능력 자체를 향상시킬 것은 분명해 보인다만, 점점 늘어만 가는 노령층을 부양하고 이들을 대신해 일할 새로운 세대는 그 수가 부족하다고 한다. 다시 되묻는다. 왜 반드시 젊은이들만 노인네들을 먹여살려야 하는가?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자본은 투입 이후 얻게 되는 초과이윤으로 스스로를 증식해야만 생존이 가능한 존재다. 그리고 그 초과이윤은 노동력에서 발생한다. 맑스가 언급한 바, 투입된 비용(임금)보다 더 높은 생산량을 가져다주는 노동력이라는 생산수단이 바로 이를 가능하게 만든다. 노동력은 임금으로 지불된 자신이 가치를 온전히 상품에 이전할 뿐 아니라 잉여가치도 덤으로 얹는다. 기술이 발전해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단위 노동이 가져다주는 초과이윤의 양도 커진다. 그리고 생산 활동에 필요한 수 이상의 유휴 노동력이 꾸준히 노동시장에 존재해 산업예비군을 형성하면, 임금을 낮추는 방향으로 자본이 상당한 힘을 갖게 되는데, 기술의 발달로 다수의 노동이 단순화되거나 아예 대체되어 버리면 그러한 경향은 한층 더 강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데에 걸림돌이 있으니 바로 낮은 출산율이다. 분명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성이 증가하고, 사회 전체의 잉여노동도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은 자본의 이윤 획득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지만, 저출산에 따른 노동인구 감소는 이를 상쇄하는 힘이다. 그래서 나는 인구의 감소 전망과 관련해 언론, 학계, 정치인, 기업 등 오피니언 리더들이 진짜 걱정하는 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기반이 붕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라, 그저 현 체제, 즉 현재와 같은 생산-분배체제와 권력기반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정된 생산수단을 활용해 생산해 낸 사회 전체의 부를 100이라고 보고, 이중 전체 노동자들의 소득으로 배분된 몫을 55라고 하자(실제로 한국의 지지난해 노동소득분배율은 56.24%였다. 한국일보, 2018.8.15., “노동소득분배율 20년새 10%P 추락”). 지금까지 대다수 인구의 부양은 이 55 이내에서 해결이 되었다. 하지만 노동시장에 참여하는 인구가 점점 줄어들 계획이므로 임금의 수준이 지금처럼 그대로 결정된다면, 총생산 중 노동자에게 돌아갈 몫도 당연히 줄어들 것이다. 45가 될 수도, 35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만들려면 사회 전체의 부(富) 중 노동의 몫이 더 늘어나야한다. 현재의 55 만큼 주어지는 몫을 60, 65와 같이 재분배하는 방향으로 가야하고, 노동이 아닌 재산에서 파생되는 막대한 부를 억제해야 한다. 만약 사회 총생산에서 재산 소득의 몫이 45 또는 35로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불로소득이며, 특권적인 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소유다. 현재와 같이 생산수단을 소수의 개인이나 집단이 독점적으로 점유하고, 부의 분배도 자본의 초과이윤을 일정 수준 이상 보장해주고 난 이후에야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현재의 체제에서는 점차 가시화될 인구절벽에 따른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렵다. 다가올 문제들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면 정말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이 분명한데, 그 문제는 사회적 부의 생산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사회의 총 생산역량의 결실을 적절히 분배하는데 실패해 문제를 악화시킬 것이 자명하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그에 대비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소유, 분배 패러다임을 지금부터라도 고민하고 연구해야한다. 우선은 독점자본가의 사유재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생산수단의 소유형태를 보다 공유된 형태의 소유로 만들고 생산의 결실도 보다 균등하게 나눠 갖는 소유-생산-분배 형태를 점차 확대시키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초과이윤을 재원으로 해 기본소득 등 보편적 수당의 확대 지급도 추가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치이고, 현 체제에 대응하는 정치세력들 역시 반대, 그 다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결국 사람 먼저다. 한국사회는 이 사회 각 구성원-특히 여성의 몸을 국가가 요구하는 재생산의 틀에 맞추려 갖은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노력은 국가와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보다 개인의 행복을 더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이 확립되고, 이를 억압하는 어떠한 행위에도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의 태도로 인해 물거품이 될 것이다. 어떻게든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출산한 아이에 대한 선별적 지원을 확대하고, 이러한 의도에 반대되는 낙태죄를 계속 유지하려해도 소용없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더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만, 점점 더 불행해지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아이를 가지는 순간, 우리는 개인의 행복을 완전히 포기해야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내가 몸을 아파서까지 세상에 태어나게 만든 한 생명 역시 행복을 보장받는 주체가 아니라 사회 유지의 도구로서 대우받을 것이 뻔한데, 과연 누가 자신의 삶, 자녀의 탄생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인가. 그렇게 설계된 사회, 인간을 (생산)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세상에서 현실 인식이 바뀔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은 그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억지를 쓰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동안 어떻게 하면 이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지를 고민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지금 세상을 재설계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절실히 필요하고, 이를 위해 사회적인 소유와 생산양식, 부의 분배방식도 꾸준히 논의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최저임금 조금 오른 것을 가지고 경제가 엉망이라며 성토하는 몇몇 언론기사와 논평을 읽어보면, 우리 사회가 갈 길은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삶-정치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우리의 과제다.     


2018.9.8.

82년생 김지영 씨와 더불어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김지영 씨와 더불어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2016년 출간 이후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고 있고, 많은 이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책. 한편에서는 수많은 대중들의 마음속에 울림을 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이 덧씌워지고 분노어린 남성들로부터 공격당하기도 하는 책. <82년생 김지영>을 지난 주가 되어서야 한 번 읽어봤다.

 

82년생 김지영 씨는 누구인가? 김지영 씨는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해서 쓰여지게 되었는가? 이 책을 읽고 당장 내 머리 속에서 가장 많이 맴돌았던 질문이었다. 김지영 씨는 특정한 누군가를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김지영 씨와 동일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30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내가 바로 그 김지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살아오면서 보아왔던 할머니, 어머니, 누나들, 여성 친구들의 삶이 이 소설 속 김지영 씨의 할머니, 어머니, 언니 그리고 김지영 씨 본인의 삶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누군가 말한대로 김지영 씨는 우리 일상의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특별한 인물이거나 또는 그와 반대로 작가가 만들어낸 개별 현실에 속에서만큼은 실제로 살아있을 것만 같이 생생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인간을 허구적 인물이라고 지칭하는데, 김지영 씨는 그렇지 않다. 도리어 김지영 씨는 흡사 다큐멘터리나 르포에 등장하는 사회 일반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일종의 통계적 표준 모델을 스토리로 구성한 것처럼 이 소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살아나간다.

 

엉뚱하게도 내 머리 속에서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소시민 여성 한 명과 수천, 수만 군중들을 지배하는 절대자 간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어 보임에도 말이다. 리바이어던은 멀리 보아서는 왕관과 검을 쥔 단 한명의 거인으로만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보아야 비로소 그 거대한 몸체를 형성하는 수많은 사람 개개인을 볼 수 있다. 성격은 다르지만 김지영 씨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우리 시대 여성의 하나의 표상이지만 또 그녀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그 동시대를 살아온 수많은 개별적 여성들의 삶이 그녀 속에 녹아있음을 읽을 수 있다. 다만 리바이어던을 이루는 각각의 인간들은 개별적으로는 그저 개인의 생존만을 갈망하며 만인에 대해 적이 될 뿐인 늑대(사회화되지 못한 존재)에 불과할 뿐이지만, 김지영 씨를 이루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은 대체로 그녀들보다 더 강한 권력을 쥔 남성들이 만든 질서 속에 순응하거나 저항하거나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등 고도로 사회화된 존재로서 현존한다. 어떤 의미에서 김지영 씨는 리바이어던의 역방향이다. 김지영 씨는 개별 여성들의 삶과 삶이 모여 응축된 실체임에도 현실에서는 어떠한 힘도 발현할 수 없고, 어떠한 권력도 가지지 못한다.

나는 남성의 입장에서 김지영 씨의 삶을 읽으며, ‘과연 모든 여성들이 김지영 씨와 동일한 경험을 하며 살아가는가?’, ‘한국사회에서 모든 여성들이 필연적으로 김지영 씨와 동일한 경험을 할 것이라고 너무 일반화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반발감이 문득 들었다. 많은 남성들이 나와 같은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모든 여성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은 아닌데?’와 같은 반문을 던졌던 것은 그 이유 때문이리라. 그러나 작가는 작품 곳곳에 표기된 각주를 근거삼아 그저 말할 뿐이다. 우리 사회를 살아온 보통 남성들은 여성(그리고 소수자의 삶)을 날 것으로 볼 때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때로는 어머니, 누이, 여성 친구 등 자신 주변의 여성들의 삶을 흘깃 보면서 부정하기 힘든 일부 사실이 있고, 이것에 대해 약간의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도 이 세상 속에 살면서 그것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기에,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 삶이 비도덕적이었음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에, 남성들은 끝내 자기를 정당화하고자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다.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오직 일부 승자만이 양질의 사회적 자원을 독식하는 무한 경쟁의 시대,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불안정의 시대에서는 부양하고 보호할 능력을 갖춘 마초가 될 수 없는 수많은 남성들이 점차 커져가는 상실감을 마음에 품으며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남성)들이 서있는 그 열악한 사회적 위치마저도 여성과 그 외 여러 사회적 약자의 희생 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계급, 출신 지역, 가정환경, 그리고 개인의 천부적 재능 차이와 각자의 선택에 따라 우리 사회의 개별적인 여성들의 삶들은 다양하게 전개되고, 제각기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김지영 씨는 우리 사회 여성들의 삶의 일종의 교집합과도 같다. 우리 어머니들이 살아가는 동안 적나라하게 경험했던 남존여비의 가치관과 그에 따른 차별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가사일의 참여에서 시작되는) 다른 잣대로 요구되는 역할의 차이, 언제나 남성의 시선에 대응하는 성적 대상이 된다는 것,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경제적 보상, 사회적 상승의 기회의 차이, 자연스러운 것인양 떠맡게 되는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의 힘듦과 그 힘듦 상관없이 받게 되는 비하와 조롱 등은 지금 내 또래인 30대 여성들에게조차 당연하듯 받아들여져 온 일이기도 하다. 김지영 씨의 삶은 우리 사회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지언정, 적어도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가능성이 거꾸로 남성에게도 해당되는지 여부를 생각해본다면, 그 대답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장하지만, 정답이 어디에 있는지는 정말 찾기 어렵다. 내 머리 속에서도 뚜렷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를 통해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를 만드는 것 등이야말로 그 답을 찾는 과정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보다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조망하는 여러 장르의 글들, 영상작품들, 기타 문화컨텐츠들이 많이 기획되어 대중들의 마음에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를 희망한다는 바램뿐이다.

 

2018.7.2.()에 씀. 


예멘 난민을 둘러싼 논란 – 더 좋은 사회를 위한 기회로 바라봐야

예멘 난민을 둘러싼 논란 더 좋은 사회를 위한 기회로 바라봐야

 

어느날 갑자기 그동안 한국에게는 멀고 낯설기만 했던 예멘이라는 나라에서  500명이 넘는 사람이 찾아와 난민 지위가 인정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후티 반군과 하디 정부, 그 배후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대립, 알카에다와 이를 소탕하려는 미국 등 머리가 아플 정도로 어지러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간의 갈등과 대립에 따라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그 혼돈의 땅에서 벗어나고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를 거쳐 무사증 입국이 허용된 대한민국의 섬, 제주도에까지 찾아온 것이다. 한국 정부는 갑작스런 난민 유입에 당황한 나머지 이들 500여 명에 대해 출도금지 조치를 내렸고, 난민들은 제주도에 발 묶이게 되었다.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고 하던가. 신자유주의 광풍 이후 무한 경쟁과 불안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타인을 받아들일만큼 주머니 사정도, 마음 씀씀이도 넉넉지 못하다. 타인에게 관대함을 베풀만한 베포와 자신감과마저도 남아 있지 않은 우리사회는 행여 낯선 이에게 무엇인가를 빼앗기지는 않을까, 그들이 우리를 해치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한편에서는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기 위해 들어온 가짜 난민이라는 주장에서부터 그들이 이슬람 특유의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으로 말미암아 몇몇이 테러리스트 전사가 되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이번 예멘 난민의 다수가 남성이고, 무슬림들의 남성우월주의 문화로 말미암아 이들이 우리나라 여성의 안전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걱정도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난민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으며, 무슬림 남성에 대한 공포와 편견어린 시선이 마치 객관적인 진실인양 호도되고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한 여론조사기관은 제주 난민 수용 찬반을 묻는 전국 여론조사에서 반대’49%, ‘찬성’39%로 난민 수용반대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음을 강조했다.(역설적이게도 이 전국 단위여론조사에는 정작 예맨 난민을 직접 보고 접하는 이들인 제주도민들 의견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 반대 측에서는 난민들에게도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며, 한국 정부와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난민을 수용해야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정부가 예멘 난민의 추가 유입을 막기 위해 무사증 입국이 제한 국가 목록에 예멘을 포함시켜 예멘 난민신청자의 탈출 통로를 봉쇄했으며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도 져버렸다고 비난했다. 정부가 어렵게 입국한 예멘인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하는 출도금지 조치를 내려 제주도에 고립시킨 것 역시 난민의 어려움을 배가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이 난민 협약에 조인했음에도 난민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인력과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것도, 난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공포심을 조장하는 언론의 태도 역시 인권을 옹호하는 자들에게는 주요 비판 대상이다. 극우적인 성격이 강한 한국 개신교 사회의 이슬람 혐오증과 함께 다름 인정이 되지 않는 한국사회의 배타성, 인종주의적 편견 역시 비판의 지점이 되곤 한다. 난민을 받아들여야하는 당위는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며, 한국 정부 역시 그러한 뜻에 동참하기로 국제사회에 약속했기에 이를 준수할 의무가 있다는 주장도 들려온다.

 

이 두 개의 서로 충돌하는 주장-‘국내 사회질서의 안정과 내국인 안전보장을 위해 난민 유입은 불가’ vs ‘보편적인 인권의 추구와 난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의 당위성은 각자 자신이 더 옳다고 주장하며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긋고 계속해서 대립한다. 그런데, 대중의 불안을 조장하며 권력을 유지하는 정부기관과 언론, 그리고 주요 종교는 난민 문제를 자기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고 있으며, 이들이 대중을 후자보다는 전자 쪽의 생각을 갖도록 이끌고 감에 따라 그 근거 없는 공포심은 날로 증폭되고 있다. 난민에 대해 보다 호의적이며, 개방되고 우애가 있는 사회를 만들려는 입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면 반드시 정부, 언론, 종교 권력에 대항해 대중·시민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상황을 보면 더 풍부한 이야기와 설득력 있는 주장의 근거들을 제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선 앞서 말한 (주로 육지인들의) 두 평행선이 담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단초가 될 수 있다. 몇몇 언론이 소개한 바에 따르면 상당수의 제주도민이 육지인의 우려와는 달리 예멘 난민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지낼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후원과 자원봉사를 통해 예멘 난민들에게 생필품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일부는 거처를 마련해주어 함께 지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멘인들 역시 그냥 농담 좋아하고, 상대방에게 예의바른 평범한 사람이며, “이슬람 문화 특성상 하루 다섯 번 기도하고 할랄푸드를 먹는 점을 빼면 한국 사람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느끼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한다. 일자리와 먹을거리가 없는 예멘 난민들이 일시적으로 제주도내 일손이 부족한 곳에 연결되어 일을 하는 모습이 기사화되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 산업이 발전하지 않았으며 그 경제·사회 공동체가 그리 크지 않은 제주도에 적지 않은 수의 예멘 난민들이 발 묶여있는 한, 이들을 수용해야하는 제주도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결코 예멘인의 본성은 우리와는 사뭇 달라 서로 맞지 아니하여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한 섬에 난민들을 가두어버리고, 그 섬의 주민들로 하여금 난민 수용의 책임을 전가하는, 그러면서도 난민을 아직 접하지 않은 시민들의 공포심을 방관하면서 이를 통해 현 상황을 유지하려는 국가 권력이 그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이 있다.

 

내가 의아해하는 것은 난민 수용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을 만들기 위해 또 다른 차원에서 제기할 수 있는 부분, 즉 가능한 한 난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사회에 어떠한 긍정적인 효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은 왜 그리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해서이다. 사실 당위성에 대한 주장을 강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당장 일상의 삶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우리 시민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우리 사회를 보다 개방적인 곳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의 발전과 우리의 삶의 질 향상에 어떠한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것인지 전망하고, 그 청사진을 제시해야한다. 올바른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고 언제나 할 수 있지만, 향후 전망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 그것은 비단 이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이번 일과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비록 난민 문제가 아니더라도 이미 한국 사회는 다양한 이주민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으며 세계화 시대에 그 현상은 더 가속화될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비정부 기구인 텐트 재단의 브리핑에 따르면 난민을 받아들이는데 투자한 1유로가 5년 이내에 2유로의 경제효과를 낳게 한다고말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호주 통계청 보고서를 인용해 인도적 차원에서 받아들인 난민은 일반 이민자들보다도 훨씬 강한 기업가적 성향을 보여줬다며,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익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당장에 저출산으로 미래의 노동력 부족을 걱정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새로운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막연히 가지고 있는 외부인에 대한 공포심, 일자리 상실 문제, 치안에 대한 우려는 사실 이주민의 유입 이전에 우리 사회의 개방성의 수준, 경제적 독점과 양극화, 평화와 신뢰가 담보되지 않은 사회 구성원들 간의 관계와 갈등이 만들어낸 우리 안의 괴물이지 바깥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다. 난민 수용이 곧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되려, 난민들을 받아들임을 통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영향은 비단 당장의 경제적 효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들이 잘 정착하기만 한다면 한국사회를 더욱 다양하고 역동성이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다. 다양한 인종, 문화가 융합하면서 만들어내는 창의력은 향후 우리 사회의 자산이자 경쟁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일례로 실리콘밸리의 IT 혁신과 창의성은 이주민에 대한 개방성과 포용성이 기반으로 성장했음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번 예맨 난민 유입을 계기로 난민 수용의 당위성을 넘어, 난민 수용이 우리 (시민)사회에 던져준 과제, 효과 등에 대해서까지 보다 포괄적으로 논쟁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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